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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신비-옻칠과 삼베의 흑광률(통영옻칠 미술관)

강재일 2008-06-28 (토) 00:29 추천:11 조회:1413 219.xxx.227

정해조 옻칠조형 특별 초대전에 부쳐

강 재 일

“나는 옻칠예의 표현기법을 칠의 원형질에서 찾아가는 길입니다. 나는 흑칠과 주칠, 그리고 색과 모양을 광휘(光輝)의 영역으로 이끌어 우리 전통옻칠예의 영역을 본질에서부터 확장하고 싶습니다.” 초대전 팜플렛에 실린 작가 정해조 교수(배재대학교 예술대학 칠예과 학과장, 칠 연구소 소장)의 인사말이다.
철학자 바움가르덴이 ‘미(美)’의 학문을 만들고자 했을 때 그는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원론적인 문제보다 ‘미적 반응’에 대한 내용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학이론의 초점을 감상자에게 맞춘 것으로서 감상경험의 특수성을 역설하려는 시도였다. 감상자는 대체로 개별적 관점에서 예술품을 감상한다. 그래서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간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술품이 갖는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 여기에 정치적이라는 말은 빠져 있다. 하기엔 요즘 들어 약삭빠른 정치인들이 그들의 마수를 약삭빠르게 예술의 영역에 까지도 뻗쳐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순수예술은 나름대로 그 맥을 잘 보존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예술이란 걸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세기를 풍미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마저 예술을 두고 확실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가끔 예술작품을 대할 때면 야릇한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때문이리라. 그러나 [미트의 샘]이라 명명되어진 마르셜 듸샹의 엎어진 소변기라든지, 존케이지의 [4분 30초의 정적], 그리고 아무것도 적지 않은 [백지로 된 시집]같은 것에 침을 튀기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찮다. 바이츠는 그런 것들을 일러 ‘닫힌 예술’이라 했다. 아무리 미적인 분야에 눈조차 뜨지 못한 왕초보라 할지라도 정말로 훌륭한 ‘열린 작품’앞에서는 숙연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듀이는 예술가가 없다면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적어도 좋은 예술품이란 작가의 명성에 걸 맞는 예술가의 것이라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예술품이란 적어도 예술가가 ‘책임 질 수 있는 일을 부과 한 것’이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하여 명성을 얻게 된 예술가가 그 명성을 이용하여 아무렇게나 의미 없는 짓거리를 벌여 놓고서도 ‘책임만지면’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초대전을 갖는 정해조 교수께서는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님의 수제자시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고 계신 두 노 교수의 특별한 우애가 ‘옻칠 속에서 빚어낸 천년의 광율(光率)'이란 부제의 초대전으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삼베를 호칠로 여러 겹 발라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다 옻칠을 입히는 [협저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50여점의 작품. 도록에 적힌 내용대로 그것에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에서 만들어진 원시조형과 옻칠의 본질 속에서 빚어낸 천연의 광률을 표현함으로서 작품의 비밀을 드러내게 한 것들이었다. 어찌 단순히 바르고 칠하는 노동 만이었으랴. 모름지기 예술품이란 우리 범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창의력이 가미된 독창성이 작가의 손길을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생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독창성이 가미된 것이라야 우리가 일컫는 참다운 예술품이 아니런가. 난 [새로운 형상의 흑광률(黑光律)]이란 글에서 유심히 ‘률(律)’자에 눈이 갔다. 얼핏 생각하기로는 ‘색채(黑)와 빛(光)의 비례(率)’로 해석 되었으나 찬찬히 새겨보니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형상의 ‘색채(黑)와 빛(光)의 법칙(律)’ 즉, 작가가 개척한 신세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독창성을 ‘예술가의 범할 수 없는 특별한 의도’라고 한 글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그 ‘특별한 의도’가 바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리라.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본래적 감정과 어떤 사물을 대하면서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각의 편린들. 이것들을 어떠한 과정을 거쳐 드러내 보여 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그 의도 가운데서도 특별한 것을 [예술가의 독창성]이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겉치레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머리를 길러 기다랗게 땋고 다닌다거나, 수염을 기른다거나, 술에 찌들려 밤낮을 잊고 산다거나, 디오게네스를 흉내 내며 개처럼 행동한다거나 등등. 그들의 한결같은 변명은 ‘영감(靈感)을 얻기 위함이라지만 그런 규칙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목욕재계를 마친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신독(愼獨)의 경지를 찾을 때라야 비로소 올바른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옻칠미술관을 처음 찾던 날. 난 관장님의 풍모에서 내가 그리던 작가의 진면목을 보았다. 진솔함.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큰 힘을 발양하게 하다는 ‘진솔성(眞率性)’을 본 것이다. 저토록 소탈 하실 수가 있다니. 언제나 근엄에만 익숙해 있던 나에게 관장님의 후덕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그런데 오늘 정해조 교수님을 통해 관장님의 모습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가슴에 지닌 겸손까지 답습하셨을까.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품으로써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하더라도 작품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그건 아니다. 작품에 이용된 기법이나 재료를 알고는 있었다. 삼베와 옻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한다는 정도로. 그런데 포인트는 옻이 발현해내는 빛깔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채의 신비를 오롯하게 드러내는 솜씨. 이를 일러 ‘경지에 이르렀다’ 해야 하지 않을까. 관장님의 작품이나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을 여느 감상자가 제대로 묘사 할 수 있으랴. 이미 이들 작품 속에는 작가의 이념까지도 고스란히 녹아들었기 때문에 테크닉을 빼버린 작가의 고유정신은 어떤 방법으로서도 해체 해 낼 수 없어 보인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미적경험을 설명하면서 ‘정서(情緖)는 인지적으로 작용 한다’고 했다. 모름지기 예술작품이란 ‘감각’을 통해서 뿐 아니라 ‘느낌’을 통해서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작품을 두고 [부분들의 복잡한 배열]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이 적절한 배열을 통하여 나무가 되듯이 일정한 통합의 과정을 거쳐야만 예술품이 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파놉스키는 예술의 상(像, Icon)을 3가지로 분류했다. 사물과 유사한 상을 지닌 [상적(iconic)]인 것과 인지적 관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도상적(iconographic)]인 것, 그리고 진리와 미의 관계를 표시하면서 이념을 노출시키거나 물질계의 ‘실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보여주는 [도상해석학적(iconological)]인 것. 그렇게 묘사된 것들을 두고 사물과 동일함을 찾는다든지 변형된 것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애당초 무리다. 모르긴 해도 예술작품이 품고 있는 그 자체의 ‘내밀한 언어’를 뉘라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그것들이 지닌 기호를 알지 못하고서는 어느 누구도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의 품을 떠난 작품은 이미 또 다른 하나의 유기체로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만들고 있는 까닭이다. 순수한 눈길을 잃은 존재들이 어찌 그 상징의 기호를 읽어 내랴. 어쩌면 그것을 읽어 내려는 행위마저도 환상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마르크스미학자들에 의하면 역사적 조건이 결여된 예술은 예술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 이유는 예술이 역사 속에서 역사를 통해 반영되고 지속되는 이데올로기로 설명 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예술이론은 특정 학파의 이론이라기보다 정치적 움직임에 기반 한다. 때문에 항간에는 마르크스 미학을 미학이라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는 것이다. 물론 순수 예술이란 어디까지나 정치, 경제적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이 맞다. 그러나 작금의 사조(思潮)가 어디 그렇던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작가의 출세란 어디까지나 요원한 바램 일 뿐이고 경제가 뒷받침 되지 않는 작가의 활동은 모래성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 견지라면 두 분의 작품세계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이 전제 된 것들이라 더욱 가치롭다. 나 같은 아마추어의 눈에도 그 칠이 주는 색감의 세계는 놀랍기까지 하니 말이다. 아마도 물질이 지닌 순수색이 빛과의 조화로 한층 더 발현된 것이리라. 그래서 작가의 순수가 '아이코노로지컬(iconological)'로 재탄생하는 순간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이 지닌 미적인 품격은 이미 그 품격을 넘어 표백되지 않는 진리로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이념이 용틀림 하였고 물질계의 형이상학이 강물처럼 흐느적였다. 미학자 윌튼이 그랬었지. 형식주의자들을 옹호하게 된 까닭은 미적 경험이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주목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뿐만 아니라 콜린스는 수준 높은 미술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지각 경험을 능가하는 ‘훈련’과 ‘주목’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주목’이란 어디까지나 선택적이다. 대상이 지닌 고유한 특징 모두를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적 정보를 통하여’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가늠하는 것이란 거다. 표준적 특징. 이것은 작품이 귀속되는 범주를 결정하는 구문(句文)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감상 할 때는 그 작품을 바르게 지각 할 수 있도록 어떤 특징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작품이 탄생되는 동시에 역사나 맥락이 함께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빠져버린 작품은 진정한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까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미적 가치만을 놓고 훌륭한 예술품을 논하기에는 무리라는 얘기다.

뛰어난 작품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재현된 현상’으로 볼 게 아니라 ‘제시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예술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코드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 작품을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주의는 해체주의에게 바통물림을 해야만 했다. 부재(不在)의 중요성에 대한 정직하고 명확한 설명. 그것으로서 그들은 아무리 위대한 작품일지라도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들의 횡포에 가까운 평가는 ‘기표의 잣대’에 있다. 어디까지나 기표의 가치를 지나치다 싶게 추론함으로서 보다 풍만하고 충실한 결실을 맺게 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감상적 가치에 결부시키기도 한다. 별스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작품이 어느 날 경매시장에서 높은 값을 받게 되면 그 때부터 훌륭한 예술작품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것은 예술품이 지닌 본유적 가치보다 돈이 만든 귀결적가치가 높은 사례다. 그렇다고 예술품이 지닌 본유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의 개입으로 폄훼(貶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에 도덕적 의무론이 거론된다. 최근 우리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모 재벌회사의 안주인이 벌였던 웃어넘겨 버리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던 신파극. 무슨 연유로 그 여인은 그토록 [눈물]이란 작품에 눈물까지 흘리며 연연했을까. 그런 일련의 사건들로 사회적 도덕론이 새로이 조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만약 예술가나 예술가를 표방하는 무리들이 그들의 독트린으로 기교나 예술성을 대변하고자 한다면 그건 큰일이지 않은가.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가치가 없다거나, 존경하지 못할 것들에 대해서조차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가끔 분노한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행복하다. 숨죽인 감상자들의 조심스런 발자국이 하나 둘 통영의 옻칠미술관에 새로운 역사의 나이테를 그려간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울 따름이다. 아 얼마나 큰 행복인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범주마저도 훌훌 벗어 던진 채 이토록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지근거리에 두고 감상하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Heung-sook,Lee

2008-07-06 13:56

`강재일` 님이 선택한 글 입니다.
통영 옻칠미술관에서 멋진 풍광과 진정한 옻칠의 예술을 함께 감상하는 기쁨을 같이 하고자 합니다. 한달간 전시된다죠?


강재일	그렇습니다. 어제 일요일 오후엔 부산대학교에서 근무하시다 이번에 정년을 맞으시는 엄옥자 교수님의 '춤'발표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도 작품에 여념이 없으시던 관장님과의 통화~. 언제나 온화한 관장님의 미소가 회원님들의 방문을 기다립니다. 7월 25일까지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보고 또보고 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광'과 '채'의 진면목을 보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도록 권해 올립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길 빌면서.^^*	7/7 09:11

SungreiKim 2008-08-01 23:35	논문같이 무게감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지난 번 옻칠박물관에 가서 사고싶었던 커피잔~~생각이 나요..ㅎ 이번 니뽄가서 비스무리 엄청 싼 밥그릇,국그릇 사 가지고 왔네요 색갈,무늬결이 옻칠 비슷한데...아마 우리가 통영에서 본 거랑은 품격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것이죠~ 21세기 디지털,속도문화 이 현란한 세상에서 느림의 미학처럼 이제 이러한 문화컨텐츠를 보존,개발,확장하는 시대가 될 거란 강한 예감이 듭니다 매스프로덕션 대량생산의 속물화에서 이제는 핸드메이드+소량주문생산이 각광받는 시대로 접어들 지 않겟는지요? 현명한 유럽시장은 광우병에 대처 2년 숙성시키는 수제햄등 신문에 보니 바로 그러한 컨텐츠로 대처합디다 건들팔월 동동팔월 일년 중 젤 빨리 얼릉설릉 지나가고 만다는 팔월입니다, 막바지 더위에 건강조심하시고 잘 지내십시요~

jaewesung 2008-08-26 18:27	지난 일욜 다녀왔습니다. 노 신사 관장님과 손도 잡았습니다. 어릴적 그놈의 옻땜에 엄청 고생했는데..... 그 옻액으로 만든 작품에서 십여년후의 내머리보다 더 광이 번쩍 번쩍 ~~~ 일생을 옻칠예술에 몰입하신 두분의 교수님 혼이 진하게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술의 고장 통영을 자꾸 가고 싶은 이유가 지금은 이 옻칠예 땜이고 둘째는 우리 형님 강교수님이 계시기 뗌입니다....ㅋㅋㅋ

JongSooKIM 2008-09-20 06:54	통영, 동양의 나폴리, 강재일, 정동영프로작가, 김 성수노신사 관장, 옻칠장인, 청마문학관, 낚시, 그렇지 도산으로 지금은 해외로 잠적해버린 내 친한 친구의 고향으로 한 때는 충무이기도 했지. 강재일님이 있어 통영은 더 가깝게 살아있습니다. 전시장에서 본 그 커피 잔……. 김성례님, 저도 몇 번이나 만져보고 살까 말까 망서리다 결국 그냥 두고 나온 그 커피 잔이네요. 재일님의 글은 너무 깊어서 한참 헤매다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