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을 그리며

가끔씩 승용차를 걸머쥐는 는개(霧雨).

빗기 머금은 하늘로 느즈러지는 구름.

열어 놓은 차창에 감겨드는 바람.

정해년 유월의 셋째 금요일, 음력으로는 오월 첫 날 아침풍경이다.

자잘한 일상을 밀쳐놓고 유객(幽客)이 되어 떠나는 여행.

바쁠 것 없어서 서두를 까닭도 없다.

사천 톨게이트를 지나 광양, 순천, 벌교를 경유하며 눈길 대는 대로 조국의 풍광명미(風光明媚)가 장흥땅을 건너 강진으로 이어진다.

젖 풍부한 산모(産母)같이 넉넉한 탐진강 물줄기. 잠시 목이라도 추기고 가자.

떠남이 말미이니 사방천지가 말미로다.

강진에 들러 제일먼저 김영랑의 생가(生家)를 보려했는데 그냥 지나쳐 왔나보다. ‘다산초당 가는 길’과 함께 ‘백련사’ 안내판이 눈앞에 보인다.

그래 ‘백련사’부터 보고 가자.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뒷산 중턱에 자리 잡은 신라 고찰 ‘백련사’.

대웅보전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삼성각을, 왼편에는 명부전과 응진전을, 그리고 입구 쪽으로 요사채와 범종각, 만경루와 육화당을 거느린 채 1,167살 나이테가 비에 젖고 있었다.

마침 법회중이라 부처의 가피를 얻으려는 중생들의 번득거리는 눈길을 피해 명부전으로 갔더니 연리지(連理枝)로 자란 배롱나무 한그루가 수줍게 반긴다.

기념사진 촬영을 하곤 까치발로 총총히 자리를 떴다.

[만다라 사연]을 품에 안고 얼마를 내려와서, 다산 초당 입구란 팻말을 끼고 반쯤 열린 바리게이트를 스쳐 지나는데 인기척이 났다. 염색을 하였음에도 흰머리가 눈에 띄는 바지저고리 차림의 중후한 사내가 허겁지겁 손 사레를 친다.

그 곳에는 차가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란다. 겸연쩍은 마음으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식당에 들었다. 제법 자연을 느끼게끔 배려한 주인의 손 씀 씀에 마음까지 푸근하다. 통나무를 쪼개 만든 고급스러운 식탁에 자리를 잡으며 다산선생의 이력을 더듬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영조 38년(1762년) 경기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 22세에 진사시, 그리고 6년 뒤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었고,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주상의 총애를 받으며 국정에 몰두하다가, 순조 즉위 후 정치적 음모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기구한 운명처럼 그 년대조차 ‘시팔 시팔’ 년(1818 년).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저주스런 ‘시팔’ 년(18 년)을 강진에서 보내셨고, 그 후 고향에서도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6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기셨다는 건 익히 아는 바다.

그리고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인 고산(윤선도)선생과 그의 증손 공재(윤두서)선생의 손녀가 다산 선생의 어머니란 것도.

조선 3재(齋)중의 한 분이셨다는 공재 윤두서.

이 어른이야말로 진정한 ‘다산사상’의 씨앗이다.

소요유(逍遙遊)의 즐거움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어른께서는 신물 나는 이전투구에 몸을 빠트리지 않았기에 규방가사와 설화집(소양란전)은 물론, 현대 기하학에 버금가는 ‘송양휘산법’과 인물, 산수화의 그림과 더불어 ‘기졸’이라는 미술 평론서까지 저술 하셨지 않았던가. 더욱 기가 막히는 건 ‘대동여지도’가 고산자 선생으로부터 만들어지기 150여 년 전인 18세기 초에 이미 선생께선 숙종의 명을 받고 48명의 첩자와 함께 일본정벌의 교두보를 마련키 위해 ‘일본여도’란 지도를 그리셨다니.

어디 그 뿐인가.

거문고를 직접 만들고 그 제작법과 사용법까지 수록한 ‘회명정측’과 악보를 수록한 ‘남응신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문학, 수학, 물리, 천체, 의학, 병서, 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는 박학다식의 어른께서 천재성을 지닌 외손자를 끔찍이도 총애 하셨으리라.

만약에, 정말 만약에 공재 선생께서 벼슬길에 계셨더라면 지금의 다산을 어찌 장담 할까. 선생께서 지녔던 온갖 철학 사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가 바로 다산이다. 물론 다산 역시 국정에 몸을 맡겼더라면 이토록 원융무애 한 학문의 열매를 어떻게 맺었을까마는.

다산은 7살 때 벌써 한시(漢詩)를 지었다고 한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려 보이지가 않네(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운 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네(遠近地不同)”

아직 안화(眼花)도 마르지 않은 초립동이의 추리력을 보라.

크고 작은 형이하학으로 멀고 가까움의 형이상학을 현시(顯示) 해 내는 직관력을.

초당 입구.

멀리서도 다산과 추사(김정희)의 느낌이 전해지는 현판과 주련이 눈길을 끈다. 다산 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이란다. 모각(模刻)이었다. 하지만 모각이기에 완상(玩賞)이 가능했고, 완상의 즐거움으로 기쁨은 배가(倍加) 된다. 마침 나들이 길에서 돌아 온 주인 할머니를 만나 사진 한 장을 찍고는 초당(草堂)으로 향했다.

비 뿌려진 황토 길. 한 번의 엉덩방아와 두어 번의 뒤척거림 끝에 가까스로 다다른 초당(草堂)마루엔 먼저 온 학생들의 고성방가가 온 마당을 헤집고 다녔다.

그들의 소란을 피해 ‘정석(丁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 아래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서암(西庵 : 제자들의 거소)’과 ‘동암(東庵 : 자신의 거소)’을 거쳐 ‘관어재(觀魚齋)’를 돌아 나오다 탐진강 돌을 날라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에 발길을 멈추었다. 잠시 바위를 쓰다듬으며 님의 정취(情趣)를 사모해 봤다. 선생의 지혜로 끌어 들인 계곡의 물은 아직도 그대론데 물고기의 자취는 묘연했고, 백일홍과 대나무가 어우러진 곁으로 덩치 큰 소나무랑 배경을 맞추기 위해 바위 하나가 옹곳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비라도 오는 날이면 선생께선 지필묵을 물려놓고, 이 자그마한 바위에 걸터앉아 연못속의 유영(遊泳)을 감상하셨으리라. 그러면서 당신을 다독이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신독(愼獨)에 들지 않으셨을까.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나오다 녹차 생각이 간절해 찻집에 들렀더니 아까 손사래를 치던 중년이 손님을 맞이한다.

강진군수를 지냈다는 윤동환씨다.

그는 스스로 “다산은 나의 운명”이라며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서 후손 된 책임에 열중이었다. 저술한 책만도 여러 권. 다산학당과 함께 다신계문화원, 다산학연구원, 다산기념사업회 회장까지 맡고 있었다.

그가 우려 주는 차를 마시며 자상한 설명을 듣는데, 초당에 오르기 전 잠시의 내 생각이 적중했음에 가슴이 울렁였다.

날이 저물기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서둘러 차를 몰아 영랑 생가로 갔다.

돌담을 끼고 자란 아름드리 동백과 은행나무, 녹 쓴 자물쇠가 채워 진 우물가에는 시인의 가슴을 저미게 하던 모란이 군데군데 심겨져 있었다. 찾는 이 드문 곳에서 영랑의 숨결을 더듬고도 싶었으나 발길을 돌려 무위사로 향했다.

무위사.

넓직한 주차장이 을씨년스럽다.

일주문이 해탈문인 그곳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수수한 맞배지붕의 단아한 건물이 이마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국보 제 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이다.

아무런 치장도 주련조차 없이 기둥과 들보가 발가벗은 몸으로 안겨든다.

그 안에는 보물로 지정 된 ‘아미타 삼존불’과 ‘아미타 삼존도’가 함께 있었다.

뒤켠의 ‘백의관음도’와 극락보전 왼쪽 처마 아래, 비스듬히 떨어져 있는 용머리 거북의 ‘선각대사 편광탑비’도 모두 보물이다.

지방문화재로 등록 되었다는 ‘삼층석탑’이 저물녘 나그네의 심사를 지긋이 눌러온다. 아하, 짜릿한 아랫도리의 이 전율은 초당찻집에서 마신 차 때문만은 아니리라.

다문다문 달리는 승용차의 속력이 빨라진다.

산자락에 어둑살이 드리워지면서 산중의 절집에도 밤이 내린다.

쉴 곳으로 가자.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낡은 하루를 허투루 버릴 순 없다.

오늘의 역사는 오늘에 쓰리라.

당신은 혹시 영암 월출산 앞에서 일출을 본적이 있는가.

만약 보지 못했다면 월출산 앞에서의 일출일랑 아예 생각을 말 일이다.

시각(時刻)이 만들어 내는 현란한 ‘순간(瞬間)’들이 가슴을 후빌 때 아마 당신은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 혼자서 그런 광경을 본다는 건 아침밥상을 청산가리로 대신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것이다.

하늘이 넓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산 가림이 없어 하늘의 면적이 많아졌기 때문이란 걸.

눈에 설던 너른 들판이 하늘을 넓혀준 까닭이란 걸 말이다.

이 넉넉한 구비 따라 의병장 고경명(1533~ 1592)의 사자후(獅子吼)가 메아리친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집안 식솔을 거느리고 임진란의 평정을 위해 거병하셨다가 두 아들과 함께 순국하신 선비투사 고경명.

“아! 열읍의 수령, 각처의 사민들아!

‘의(義)’는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 두덩에서 일어나 힘닿는 데까지 오직 ‘義’로 돌아가라.”

코앞의 'O'무더기에 오감이 마비되어 나라꼴을 망쳐 놓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작금의 저 모리배들이 어찌 ‘義’를 아랴.

빛이 ‘광명’이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아! 그 빛이 영원히 빛일 뿐이라면.

어제 저녁에 먹었던 ‘세발낙지와 쇠갈비’를 아침에도 먹었다.

이곳을 떠나면 못 먹게 될 음식이라고.

영암 고을에선 제법 잘 알려진 부자식당이라 간판도 거창했다.

내친김에 해남으로 가자. 가서 [고산 유물관]과 [녹우당]을 보자.

그래서 당시 그 일가의 권세도 어림짐작 해 보자.

덕음산을 주봉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차렴하게 내리 뻗고 아련한 필봉(筆鋒)이 단아하게 솟아 있는 사신사(四神使)의 균형과 조화가 어우러진 50만평의 장원(莊園).

그 가운데 6만 6천 평이 집터다. 선업(善業)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따른다는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如慶)’이란 교훈이 아직까지 꿈틀대는 윤씨가의 숨결을 놓칠 수가 없잖은가. 더욱이 12대 손(孫) ‘윤정현’의 부인 ‘광주 이씨’의 선행도 상기(想起)해야 할 품수(稟受)다.

집 뒤뜰의 비자나무 숲에서 일렁이는 바람소리가 마치 비 오는 소리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녹우당. 나라 왕 효종이 내린 재목을 옮겨 왔다는 그 당우(堂宇)에 마주 서서 안내를 맡은 문화 해설사 ‘이연숙’선생과 나누었던 고담준론(古談峻論)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성(誠)'과 '의(義)'를 오롯한 지표로 삼고 살아오신 선현들의 삶을 고찰하면서도 지금의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