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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연수기(記)

강재일 2006-12-14 (목) 10:44 조회:1852

호주 연수 기(記)

강 재 일
지천명(知天命)을 넘겨 살아온 사람이지만 나들이란 말에는 늘 맘이 설렌다.
그것도 한반도의 서른여덟 배가 넘는다는 대국(大國)인데다 적도(赤道)를 경계로 반대편 남극계의 중간 짬에 위치하면서 유난스레 자연을 숭상한다는 민족이 터를 지킨다기에 그 설레임은 더 했다.
간단한 출국 전 세러머니가 있었고 인천국제공항에서 수속을 마친 다음 기내(機內)에 몸을 실은 때가 2월 21일 저녁 8시.
잠시의 들컹거림과 조국을 떠난다는 기분 때문인지 괜스레 시장 끼가 느껴진다.
안전벨트까지 맨 자세로 저녁밥을 먹는다면 아마 내일쯤엔 허리띠 한 구멍을 더 늘려야겠지. 다이어트를 할 겸 간단히 스낵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는 칠흑 같은 어둠 속 그 무한대의 자유로 한 마리 아메바처럼 유영하는 아시아나 항공기에 몸을 맡겨버렸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도, 삶이 고달프다는 것도 어둠은 모조리 삼켜버리고 오직, 남아 있다는 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비행기 날개 끝의 반짝거리는 안전등 뿐.

오늘이 조심스럽게 어제를 밀치고 들어선다. 낡은 하루가 새로운 하루를 맞아 자리물림을 하는 시간. 측창(側窓)을 열었더니 별 서너 개, 그리고 어둠하나가 비행등(飛行燈)과 어울린다. 별이 등(燈)인지 등(燈)이 별인지. 어둠은 참 재주가 좋다.
착륙 1 시간 전. 잠시 졸았던가보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귀에 설다. 창 밖으로 보이는 시드니의 하늘엔 창공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달려온 우리일행보다 앞서서 붉은 아침 해가 일찌거니 능답(陵畓)하고 있었다.
시드니공항.
유럽의 힘은 독서에서 오는가. 게이트 곳 처에 마련된 휴게실은 얼굴색이 희고 콧날이 오똑한 노랑머리들의 독서실을 방불케 했다. 각양각색의 인종 군(人種群)들이 책에서 눈을 놓지 않는 가운데 소란스레 두드러지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 목소리의 주인들은 불행하게도 황색피부를 가진 우리 동족이었다. 짜투리 시간에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건 덤으로 얻은 생명 같아서 경이롭다. 책이나 신문, 잡지를 읽고, 간혹 전화를 걸기도 하고, 열심히 무엇인가 적기도 하고, 그러는 군중들 틈에서 이삿짐 같은 보따리를 끌어안고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무리들. 시드니공항에서 처음 본 세계인속의 한국인. 피곤이 덕지덕지한 그들의 매무새에서 그들만의 삶이 짐작된다.

.............2개월의 연수 일정이 끝나고 신나는 여행............
줄곧 쳇바퀴 돌 듯 하던 시드니 생활을 벗어나 브리스베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사람이 사는 도시를 벗어난 곳부터가 태초의 땅 그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그저 그렇게 자연스런 어울림 그 자체가 자연이 아닌가.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코스모스(KOSMOS)다. 간간이 구름 사이로 다듬어진 산길. 굽 지게 흐르는 시냇물과 조화를 이룬 잘 가꾸어진 정원 같은 사방의 잔디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브리스베인에 도착하자마자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베트남식 점심을 먹고는 곧장 휴양도시로 알려진 골드코스트로 달려 일정표에 따라 퀸스랜드 수산부에서 주(州) 정부 매니저먼트 미스터 짐의 브리핑을 들었다.
연방정부(聯邦政府)와 주 정부(州政府)가 민간단체와의 유기적 협조아래 어떤 이슈라도 민주적으로 해결해 낸다는 설명은 그의 자유스런 옷차림과 어울려 전혀 사무적이지 않았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호 군락지의 보존을 위한 국민적 협의(協議)는 비단 어족자원(魚族資源)의 보호차원을 떠나 입어(入漁)를 금지시키는 등의 적극성을 보이고 있으며, 지구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목표로 민(民)과 관(官)이 긴밀한 상호 협동 체제를 유지한다고 자랑이다.
어둑살이 질 무렵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한식당에서 불고기정식을 먹었다. 기내에서 웅크리고 버틴 탓인지 식곤증이 밀려오면서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진다. 오호라! 크라운 프라자 슈퍼 파라다이스 호텔. 이름한번 거창하다. 크라운도 그렇고 프라자도 그렇고 슈퍼도 그렇다 치자. 그러고도 모자라서 파라다이스란다. 구약(舊約)에서는 ‘에덴의 동산’이요, 신약(新約)에선 ‘천국’을 일컫는 말. 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일랑 골드코스트 해안에 밀려드는 파도에게 부려놓고 맘껏 행복을 만끽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이름말이다.
룸 메이트를 정하고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육신한테는 숙면(熟眠)보다 더 좋은 보약이 없는 법. 숨은 인재(人才)를 찾아내는 일이나 손톱으로 후벼 파듯 남의 흠을 들추어내는 일을 파라척결(爬羅剔抉)이라 한다.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동행자의 인격이나 평시의 습관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으니 이야말로 파라척결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것이 동료의 흠 잡이 용(用)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기초여야 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自然)! 당신은 과연 참 자연을 본적 있는가.
당신이 지금껏 보아왔던 자연이 진정한 자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말 그런 자연이었던가. 우리에게 낯익은 자연이란 인간에게 유린당한 처절한 모습들이 아니던가. 세익스피어는 “인간의 오만이란 초라한 자신의 변호를 위한 벌거벗은 원숭이의 재롱에 불과 할 뿐이다”라 했다. 이 말은 아마도 어리석은 인간이 풋내 나는 재롱으로 자연을 울리는 걸 꼬집어 준 게 아닐까.
태평양 남녘. 끝없는 수평선 너머엔 핏빛 포의수(胞衣水)를 흘리며 태양의 분출이 시작되고 있다. 지구의 자전속도가 시속 1,670 키로 미터. 공전속도는 분속 1,800 키로 미터. 그리고 은하계를 공전하는 태양의 속도는 초속 250키로 미터라는 글을 어느 과학 잡지에서 읽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이런 기막힌 사실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런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 속의 해 오름을 어떤 맘으로 맞이해야 할까. 아침 산보를 나온 몇몇을 제외하곤 거리는 너무도 한적하다. 잠이 들깬 골목마다 여유와 풍요가 뒹굴고 다니면서 삶이란 ‘치열한 생존 경쟁이다.’ 라는 등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삶다운 삶은 이렇듯 여유로 즐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전망 좋은 26층 회전 로비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마크스로드 울롱바에 위치한 새우양식장을 방문하기 위해 버스는 또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울울창창한 밀림을 지나면 광활한 목장이 있고 광활한 목장을 지나고 나니 또 울울창창한 밀림이다. 커다란 사탕수수밭을 몇 블록 지나 마린새우 양식장은 그곳에 있었다. 새우의 종묘입식(種苗入殖)시기부터 주 정부의 수산공무원이 파견되어 모든 업무를 지원한다고 하니 그 나라의 세입수익이 많은 이유가 당연하다.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후 버스를 타고 새우를 양식하고 있는 현장을 견학했다. 가끔씩 새우를 사냥하기 위한 무리 지은 새떼들의 비상(飛翔)이 눈에 띄었으나 먹을 만치 가져가도 남는 게 더 많다는 말이 그의 속 너름을 짐작케 한다.
가공업체를 방문할 땐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운 일이 꼭 하나있다. 그 공장에서 가공하는 제품의 시식(試食)말이다. 알맞게 잘 익혀진 통 새우를 세 번의 손놀림으로 말끔하게 장만해 내는 사장님의 유머가 정겹다. 기념사진촬영과 선물교환. 그리고나서 정수리가 따끈 거리는 햇볕을 피해 점심식사를 겸하여 쉴 수 있는 시-월드로 달렸다. 해양(海洋)과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단골메뉴의 으뜸으로 자리 굳힌 돌고래 쇼를 비롯한 수상스키 묘기.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쇼킹했던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을 너무나 함부로 유린(蹂躪)한 결과 인간이 겪을 재앙을 암시하는 내용을 주제로 한 짧은 홍보영화였다. 자연의 몰이해(沒理解)에서 빚어지는 인류미래를 걱정하는 맘으로 여장을 풀면서 노자(老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되새겼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모닝콜이 울리기까지 만만찮은 여유가 있었다. 이곳까지 왔다가 남태평양의 바닷물에 육신한번 담궈 보지 못하면 평생 후회가 될 것이라며 장흥사무소 K소장과 팬티차림에 해변으로 내 달렸다.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부드러운 모래의 촉감. 발목을 감아 오르는 남태평양의 온기 있는 바다물결. 나즈막이 나는 잿빛날개의 갈매기와 어우러져 광란의 탱고를 멈추지 않는 육중한 해안의 파노라마. 이 모든 감미로운 축복 속에 태양은 어제보다 더 진한 양수를 덮어쓰고 시커먼 구름덩이를 밀치며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싸아한 해풍을 맨몸으로 안으며 태평양의 질 벽(膣壁)을 더듬는 순간 노도는 감쪽같이 나를 자궁 속으로 낼름 삼켜 버렸다. 죽음이란 결코 사치한 여행이 아니다. 부지불식 예약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데서나 불쑥 손을 내민다. 그것에는 아무런 탈렌트도 없다. 적도로부터 한번의 반란도 일으킨 적 없는 그 파도가 키 높이 만큼일 때 그건 바로 죽음이다.
혼신의 힘과 맞바꾼 무사귀환. 체념(滯念)의 순간순간들. 본의 아닌 사투를 벌이고 그런 후의 여여(茹茹)한 광경! 죽음 한 조각을 뜯어놓고 골드코스트를 떠나며 온통 머리엔 해안가에 널부러져 있는 내 주검의 형체뿐이었다. 파라다이스 컨츄리 농장에서 양몰이 재주를 볼 때도, 양털 깎기 장끼랑 부메랑 쇼를 보는 관람객들의 커다란 행복 속에서도 늘 주검의 그림자는 내게 등을 대고 있었다. 죽음이란 삶과 서로 배를 맞댄 일란성 쌍둥이가 아닌가. 베리스베인으로 돌아와서 반죽음의 하루를 털어 낼 때까지 뇌리 속은 비워지지 않았다.

칼톤크레스트타워 호텔. 늘 새로 맞는 아침은 신선하다. 어제의 공포는 고스란히 미뤄 놓은 채 아침 산보에 나섰다. “근면한 사람에게는 일주일동안 일곱 개의 하루가 있지만 게으른 자에게는 일곱 개의 아침만 있을 뿐이다.” 란 독일의 속담을 상기하면서.
로마 스트맅! 아하! 로마거리라~
심복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 맡긴 네로의 광기(狂氣)가 아직도 매쾌한 연기로 피어 날것만 같다. 세상의 화려함과 복고와 무질서가 혼재하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그 로마. 담을 넘다 들켜버린 도둑놈 같이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온갖 것들의 흥망성쇠를 이곳에 묻기 위해 이름을 이렇게 붙였을까?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귀찮아서 디오게네스도 이곳에 와 있는지 모른다.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쥐어놓고 무덤에서만큼은 빈손만 덩그렇게 내 놓은 당당했던 사나이 알렉산더가 텁텁한 손 악수를 청할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외치던 베드로를 떠올리며 발길을 옮기던 나의 상상은 무색한 것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세상의 온갖 기화요초로 꾸며진 시민들의 산책로요 휴식공간이었던 것이다. 붐비지는 않았으나 여느 곳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만나는 면면(面面)이 화기(和氣)로워 어중중한 인사를 했다. 어줍잖은 그 인사를 그들은 살갑게 받아 주었다. 그 어중중한 인사 속에는 세계만국의 공통어인 친절(親切)과 미소(微笑)를 설탕처럼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이 낯선 곳을 찾아 익지 않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 커다란 재미다. 이곳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음은 아름다운 자연과 터놓고 생활하는 이곳의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자연을 가꾸지는 못하나 자연은 사람을 가꾸어 간다. 세상 참!
호텔에서 뷔페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브리스베인 공항에서 시드니 행 비행기를 탔다. 시드니에 도착하는 즉시 관광청 공무원으로 재직한다는 챠밍한 스타일의 현지가이드 Y의 안내로 곧장 선착장으로 가 선상에서 점심을 먹었다. 데면데면한 동포 관광객을 만나 사진 찍기도 하면서 잠시 고국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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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오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딱히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밉던 얼굴들이 잠시잠시 보고파진다. 자연 생태계의 보존이야말로 국가의 운명이라 여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렙테일 야생동물 파크를 관광한 후 듀랄롱 리조트에 4월 25일의 여장을 풀었다. 마침 국내에서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찾아온 여행사 여직원의 생일을 맞아 산 속에서 피워 올린 우리들의 우애(友愛)는 이국의 밤하늘에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을 달아 놓았다. 2명이 한 조(組)가 되어 열댓 평쯤 되는 2층짜리 콘도미니엄에서 늦으막한 기상(起床)을 했다. 역시 늦잠이란 돈 들이지 않고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뷔페로 아침 식사를 했다. 포토스테판까지 가는 버스에서 현지 가이드 Y군은 자기의 색시 감 구해 달라는 부탁을 노골적으로 해 댔지만 그것이 밉지 않은 건 왜 일까?
달 그림자 여행 (문 새도우 크루즈).
선상(船上)에서 보는 야성(野性) 돌고래들의 유희를 보고 나서 또 한참 버스를 타고 도착 한 곳은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바다에 접한 사막. 목에 유난히 잔주름이 많고 관자놀이에 주근깨가 깨덕깨덕 붙은 호주 토박이 처녀의 드라이빙 솜씨에 감탄하면서 일행은 모래썰매를 즐겼다. 돌아오는 길. 사막에 연결된 바다에서 쉬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발목을 적시며 조개를 캐는 열사의 정취에 빠져 보기도 했다. 머리에 끼인 간 끼 때문인지 로체스 리조트에 들어서자 몸은 절여진 배추같이 널 부러진다. 4월 하순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간 것이다.
새 날이 밝자 또 다른 하루를 만나기 위해 거리에 나섰다. 20여분을 걸었을까. 눈앞에 펼쳐지는 호수 같은 해안과 하얀 돛을 가지런히 접고 있는 요트들. 유난히 요트를 좋아하는 내가 부뚜막의 얼음장 녹듯 녹아 버린 건 당연했다. 군데군데 잘피 들이 널려 있는 이곳 해안의 모래 역시 발목에 감기는 기분 좋은 느낌 그것이었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준다고 해도 난 이곳이 더 좋은걸!
하지만 어쩌랴. 호주의 수산행정을 총괄한다는 뉴사우스웰즈 수산부를 방문하기 위해 짐을 꾸려야 했으니. 여기서도 역시 수산자원의 보존과 해양환경보전이 최대 이슈였다. 한데, 일 국(一國)의 수산행정을 도맡은 이곳의 공무원 수가 총 91명이라니? 그것도 연구원을 포함한 전체 인원이란다. 산(山)절로 수(水)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다. 이를테면 자연이 자연스러우니 인간도 인간답고, 인간이 인간답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연은 자연적으로 자연스러움이라. 하지 말라고 할 것과 하라고 할 것이 없으니 공무원이 많아야 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은 저절로 다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그야말로 무위자연이니까 말이다. 국가공무원의 권위. 그것은 조그만 연못 속에 갇힌 어미고기의 뱃속에서 부화를 기다리는 어란(魚卵)보다도 작아 보였다. 시장 끼를 거두기 위해 점심을 먹었으나 한참동안 속이 메스껍다. 내 속에도 쉰밥 같은 공무원이란 권위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일까. 점심을 먹고 수산시장을 둘러봤다. 경매 끝난 파시의 장터는 을씨년스럽다. 머리칼이 날릴 만큼 거세진 바람이 더욱 분위기를 돋운다. 먹구름이 한 움큼 서편 하늘을 덮어온다. 일년 내내 오는 비가 겨우 우리나라 장마철 한달 정도의 강우량이라더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귀한 비를 맞으려나.

귤을 썰어 엎은 듯한 모양의 건축물. 아버지의 대(代)를 이은 딸이 조개 껍질형상으로 기둥이 없는 건물을 완성하고 음향기기가 소용없게 만들었다는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돈 많은 미국인이 금세기의 중반인 2040년까지 임대 해 버렸다는 웅장한 스케일의 하버 브릿지. 볼트 낫트를 조이기 위한 인부 30명이 양쪽으로 나뉘어 작업을 해도 중간에서 만날 땐 5개월이 걸린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철교. 손바닥 안에 잠기는 작은 디지털 카메라에 그런 위용도 무참할 뿐,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우리는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가랑비는 가라고 내리는 비란다. 스위스그랜드호텔. 하나같이 호텔은 거창한 수식어를 꼭 달고 있다. 이곳에서 묵는 4월 27일의 밤이 호주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룸메이트의 코고는 소리와 쿨럭 쿨럭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조용히 그리고 가만가만히 가랑비가 내리는 속으로 호주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밝아왔다. 고뇌로부터 진정한 삶이 갈구(渴求)된다면 이곳에서의 고뇌란 잘 구워진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나라.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공존할 수 있는 나라.
대지의 너른 품에서 속 좁은 자들의 비웃음도 삭혀 낼 줄 아는 자연의 대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나라. 눈으로만 보고 가슴으로만 느낀다는 한계를 없애준 나라. 누구하나 바쁘지 않으면서도 행복과 풍요로움을 주머니 속 간식처럼 언제든지 챙겨 먹을 수 있는 나라. 그렇다고 그들의 발길에 차이면서 이곳에 살수는 없는 노릇. 우리가 만들어야 할 우리의 금수강산. 아! 대한민국이 10시간 남짓이면 우리를 반길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때 그 때가 가장 아름답단다. 그것은 절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절제란 단순한 감정의 발로가 아닌 잘 정제된 알약 같은 이성을 말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어느 때든지 용감(勇敢)하다. 용감(勇敢)이란, 이성의 옷을 입지 않은 용맹(勇猛)과는 다르다. 용감한 자는 인내(忍耐)할 줄 안다. 인내란 곧 자연이며 도(道)다. 우리가 생명처럼 여기며 숭앙하는 것이 도(道)가 아닌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온 나라. 자연을 자연이게 할 줄 아는 나라. 그 곳에서의 가르침을 난 잊지 않으리라. 이성(理性)이라는 속옷을 입고, 용감(勇敢)이란 투구를 들고, 인내(忍耐)라는 외투를 항상 손질하면서. (끝)

성재위: 강교수는 제가본 호주는 "참 자연다운자연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호주연수기>를 읽어보니 5년전에 가본 그곳에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네요 지난 여행 다시 회상할수 있도록 올려주신 글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2/15-15:06]-

이흥숙: 다양한 삶, 아름다운 자연이 공존하는 곳에서의 연수내용과 여행기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12/16-09:03]-

최원상: 우리사는 밑에동네 아름다운곳의 이야기를 그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글로 수 를 놓아주신 강재일 회원님께 감사 드립니다. -[12/20-10:32]-

문건주: 정말 훌륭한 글 솜씨에 감탄!!! 기행문의 새로운 경지를 자주 보여 주시길- -[01/10-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