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서바스 3일째

이시와 상이 차려주는 거창한 아침식사를 먹고 짐을 챙겨 차고까지 내려오니, 그녀는 오니기리 도시락에 음료수, 과자, 밀감이 들어 있는 봉지를 우리 두 사람에게 하나씩 주었다. 일본인은 대인관계에서 절대로' 메이와쿠'( 남에게 폐가 되는 일)를 하지 않고 ,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을 헤아려 신경을 써주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것을 일본어로 '기쿠바리'라고 말하는데(이 원복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이시와 상의 철저한 기쿠바리는 우리를 감동시켰다.

유후인으로 가는 고속도로 변에 아직도 겨울의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날씨는 눈부시게 화창했다. 눈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의 푸른빛이 봄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일본은 사계가 분명한 아름다운 나라이다. 뚜렷한 4계절의 변화 속에서 아름다움의 순간을 포착해서 짧은 17자 속에 표현한 하이쿠가 일본의 국민시로 된 것을 이해할 만한다. 이시와 상은 하이쿠는 너무 짧고 압축된 정형시라서 이해하기 힘들어서 31자로 된 단가(短歌,탄카)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40-50분가니 유후인에 도착했다.

우리가 야외온천을 하고 싶다고 하자 '야마노 호텔 무소인'이라는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가 돈을 내려고 하는데 입욕료를 이시와상이 먼저 지불해 버렸다. 우리가 무안해하자, '"This is my last service." 라고 하면서 웃었다. 정말 이시와상은 끝까지 우리를 spoil 시켰다.

산속에 있는 '무소인'에는 계속 택시가 손님을 싣고 들어 왔다. 거의가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었다. 젊은 남녀 쌍쌍도 있고 삼삼오오 모인 그룹도 있었다. 카운타에 앉은 여자는 한국 손님이 많아서 오늘은 마치 한국의 날 같다고 신이 나 있었다. 서둘러 노천 가족탕으로 가보니 간발의 차이로 어느 한국 젊은 커플에게 뺏기고 말았다. 노천온천에서 눈덮힌 유후다케를 바라보며 멋진 온천경험을 해보려고 했던 꿈은 사라지고 조그만 건물 안에 들어가 잠시 실내온천을 했다.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유후인은 조그만 온천마을이다. 호수의 잉어가 수면위로 뛰어 오를 때 비늘이 햇빛에 반사되면서 금빛으로 보인다고 긴린고라고 이름 지어졌다는 호수에서 기념 사진 몇 장 찍고, 민속마을을 둘러보고 역 쪽으로 천천히 걸어 갔다. 조그만 가게들이 늘어선 아기자기한 쇼핑거리는 완전 여성취향이고, 젊은이들의 거리였다. 소바 300엔이라고 길옆에 간이 의자 몇 개 놓고 가스버너 하나 놓고 솥을 걸어 놓고 하는 노천국수집이 보였다. 이시와 상이 싸준 도시락에 뜨거운 국물만 있으면 충분한 점심식사가 될 것 같았다. 셀프서비스였는데 일회용그릇에 젊은 남자가 소바 조금 담고 국물 두 국자 담아주었다. 남편이 그 남자를 보고 국물 좀 더 달라고 하자, 나도 따라 국물 좀 더 주세요 했다. 그 남자는 마지 못해 국자에 국물 한숟갈 정도 뜨는 둥 마는 둥 덜어 주었다. 순간 내 얼굴이 뜨거워 졌다. 예사로 공짜로 반찬을 추가하는 한국식당에 길들여진 우리의 실수였다. 고작 300엔을 내고 추운 날씨에 가스버너로 힘들게 데운 국물을 공짜로 더 달라고 하다니 한국인을 얼마나 염치없는 사람들로 생각했을까.

구마모토로 갈 일정 때문에 그 유명한 유후인의 일본전통여관에서 하루 밤 자면서 색다른 일본문화를 체험해 보지 못하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고 서바스경험이기 때문에 미련을 떨쳐버리고, 다음 서바스를 만나기 위해 유후인 역에서 2시17분발 열차를 탔다. 그리고 4시1분에 구르메역에서 구마모토행 열차로 바꿔탔다.

구마모토에서 우리를 호스트해줄 사람은 올해 46세의 노나카 이즈미이다. 그녀는 피부관리사로 일하고 있고 남편 노나카 케이수키는 은행원이다. 슬하에 4살된 아들이 있다고 했다. 처음 그녀에게 호스트를 구하는 이메일을 보내자 답장이 왔는데, 영어단어 사용이나 문법이 이상한 부분이 많아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그녀의 이메일만으로는 그녀가 호스트를 승낙하는지 조차 애매했다. 이메일을 다시 보내 당신의 영어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차라리 일어로 메일을 보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영어가 능숙하지 못해서 일어로 쓴 메일을 영어자동번역기로 번역을 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자동번역기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안 그녀는 이후로 일본어로 메일을 보내왔다. 그녀의 일어는 너무 아름답고 정중해서 만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사진교환도 했는데 그녀는 다소곳하고 얌전한 전형적인 일본여성의 모습이었다.

구마모토에 도착하니 17시 19분. 맑고 투명한 피부에 수수한 차림으로 역에 나타난 이즈미상은 역시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은 수줍어하며 말씨도 조용조용하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작년에 구마모토의 이시바시 부부의 권유로 서바스가 되었고, 호주 서바스 부부를 호스트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메일에서 자기는 아직 새내기 서바스이고, 영어도 서툴러서 서바스 손님을 제대로 호스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우리가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녀의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회전초밥집으로 갔다. 이시바시 부부가 나와 있었다. 이시바시 부부는 해외여행도 많아 해보고 서바스활동을 오래 해서 영어도 잘하고 화제도 풍부했다. 이시바시씨는 정년으로 은행에서 퇴직하고 협소한 콘도미니움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서바스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시바시 부인은 한국드라마 매니아인데, 평소에 드라마같은 것은 보지도 않던 남편이 최근 대장금을 보고나서 한국드라마의 매력에 푹 빠져 지금은 두 사람이 함께 매일 저녁 한국드라마를 본다고 했다.

이시바시부부와 작별하고 우리는 이즈미 상의 차를 타고 '코우사 마찌'라는 시골마을로 향했다. 구마모토역에서 40-50분 걸려 어두운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어느 일본 전통가옥 마당에 멈췄다. 차를 내려서 보니, 깜깜한 하늘에 밝은 별들이 금방 쏟아져 내릴 듯이 가득했다. 야! 하고 저절로 탄성을 나왔다. 이즈미 상은 너무 멋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메일에서 자기 집이 낡고 오래 된 전통가옥이라고 몇 번이고 걱정을 했는데 지나친 겸손이었다.

현관 문을 열자 한 할머니가, " 어서 오십시오. 누추한 곳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전문학에나 나올 그런 일본어 경어로 말하면서, 마루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너무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들에게 이즈미 상이 자기 시어머니라고 소개해 주었다. 올해 연세가 76세이고 허리가 좀 굽었지만, 피부관리사일을 하고 있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가사와 육아를 맡아 하신다니 아직 정정하신 것 같았다. 4살짜리 외아들 류헤이군은 지금 자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우리를 다다미 방으로 안내했다. 석유난로를 피우고 이부자리를 펴주셨는데, 요를 깔고 그 위에 담요 2장을 깔고, 두꺼운 오리털 이불을 놓고 이불위에 담요를 2장이나 더 덮어 주셨다. 굽은 허리로 송구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이부자리에 신경을 쓰시고도," 방이 좀 추워요" 하고 걱정을 하셨다. 우리는, "일본식으로 먹고 일본식 주택에서 살면 일본사람처럼 장수할 것 같아요. 이번 여행에서 다다미 위에서 자면서 일본생활문화를 직접 체험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겐 행운이예요."라고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세면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 집 외아들이 잠에서 깨어나 방긋방긋 웃으며 우리 방으로 왔다. 나이에 비해 몸이 작지만 아주 똘똘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이즈미 상이 늦게 결혼해서 40살이 되어 낳은 귀염둥이다.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 온 초코파이를 주니까, 아주 예의 바르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인사를 했다. 류헤이군이 나갈 때 우리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스리퍼를 가지런히 정돈해놓고 갔다. 4살짜리 어린아이의 조그만 행동에서 철저한 일본가정교육의 일부분을 본 것 같아 놀라웠다. 석유난로를 피웠지만 방안의 냉기는 여전하고 석유 타는 냄새 때문에 기침이 나와서 견딜 수 없었다. 석유난로를 끄고 대신 털장갑을 끼고 양말을 있는 대로 다 신고 마후라까지 목에 두르고 3겹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다다미방의 겨울냉기가 아무리 얼음같이 차가워도 우리를 환대하는 온 가족의 마음씨가 너무 따뜻해서 내 마음은 봄날같이 훈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