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여행 제 1일

카멜리아호에서 하선하여 여객터미널을 나오니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JR 하카다역으로 갔다. 버스운전사가 어찌나 버스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모는지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아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가이트북에는 17분 걸린다고 나와 있지만 거의 30분이 걸린 것 같았다.

역원에게 한국에서 구입한 3일 철도 패스를 여권과 함께 보여주고 오이타행 특급 소닉을 탔다. 기차 안은 독서하는 사람들과 나직하게 대화하는 사람들로 너무나 정숙했다. 한국처럼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창 밖에 비치는 무채색 주택들과 금방 빗자루로 쓸어 놓은 듯한 정갈한 거리를 바라보니 내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나라에 살면 길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어느 제일 교포는 일본에 있으면 모든 것이 너무 질서정연하고 규격화되어 있고, 모두가 예의를 지키느라 너무 조심을 해서 가슴이 답답하다가 한국에 오면 가슴이 뻥 뚫리고 시원해진다고 한다. 스트레스 없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가 되는 것일까?

하카다에서 기차를 타고 벳부를 거쳐 오이타로 향했다. 오이타에서 우리를 호스트한 사람은 올해 57세인 이시와 야수코이다. 그녀는 미국에 2년간 산 적이 있고, 영어공부를 제대로 한 듯 아주 능숙한 영어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 둘은 남편들이 의사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또 그녀는 한국드라마를 좋아하고 나는 일본영화와 하이쿠(일본정형시)를 좋아해서 이메일로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일본 오기 전 한달 동안 10여통 이상의 메일을 주고 받으며 이미 상당히 친한 사이가 되었었다.

오이타역에 도착하니 깡마른 얼굴에 긴 머리를 한 여자가 Mr. Mrs. Kim 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름은 와시오 상 인데, 이시와 상이 저녁준비로 바빠서 대신 마중 나왔다고 했다. 와시오 상은 옷차림이나 모습이 완전히 소녀스타일이어서 대학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와시오 상의 차가 오이타시의 한적한 주택가에 들어섰는데 가정 집이라고는 믿어지지않는 교회당 같은 커다란 건물 앞에 멈췄다. 함박 웃음을 지으며 사진에서 본 이 집 안주인 이시와 상이 앞치마를 두른 채로 나왔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서로 끌어 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1층 현관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높은 천정에 매달린 아름다운 샹델리아와 커다란 꽃화분 그리고, 번쩍이는 층계마루가 마치 서양의 저택을 그대로 들어다 오이타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으리으리한 거실은 식당과 부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응접세트, 벽난로, 피아노 등 모든 가구가 제자리에 알맞게 배치되어 있고, 여기 저기 걸린 액자나 화분 등 소품이 전체와 너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이시와 상의 높은 안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녀가 말해주어서 알았지만 이 집은 미국 건축설계사에게 의뢰해서 설계했고 모든 자재를 미국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너무 완벽주의라서 공을 지나치게 들이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집을 짓게 하면 건축비가 훨씬 더 많이 든다고 한다. 이시와 상이 우리를 3층에 있는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3단 메트리스가 깔린 높은 침대가 있고 창가에는 예쁜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고 생수 몇 병과 갖가지 스낵이 마치 호텔방처럼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다. 나보고 바닥에서 자고 싶으면 매트리스를 하나 더 갖다 주겠다고 했다. "저의 남편은 밤에 코를 골고, 나는 좀 수면장애가 있어서 집에서는 딴 방을 쓰지만 괜찮아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아 그래요"하고는 깔깔 웃었다, "잠을 잘 자는 것은 참 중요해요. 내 딸 방이 2층에 있는데 그 애가 대학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어서 오래 동안 비어 있으니 그 방에서 주무세요."라고 하면서 나를 2층에 있는 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의 방처럼 자그마한 침대와 하얀 침구와 꽃무늬 레이스 커텐으로 꾸며진 예쁜 방이었다. 침구가 너무 깨끗한 순백이라 그 방에서 잔다면 침구가 더러워질까봐 긴장이 되어 더 잠들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남편 옆에서 자보도록 하겠다고 사양했다.

이시와 상은 2층에 있는 화장실과 욕실로 안내해서 샤워기 사용하는 법과 변기 사용하는 법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집집마다 샤워기 사용법이 다르니까 손님이 당황하기 전에 미리 알려주다니 참 사려 깊은 주인이다. 욕실 화장대 위에는 꽃 한송이가 꽂혀 있고 레이스가 달린 바구니에 비누, 삼푸, 로션 등 세면에 관한 모든 용품이 담겨져 있었다. 손님을 위해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다니 놀라웠다. 이시와 상의 집은 5 star hotel보다 더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당신이 집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을 보니 혹시 전공이 실내장식이 아니냐고 물으니 평소에 실내장식에 취미가 있기는 하지만 전공은 아니라고 했다.

이시와 상은 허스키에 고음의 목소리를 가진 활달한 여성이다. 웃을 때는 '와 아'하고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큰소리로 웃는다. 가느다란 몸매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넘치는지 계속 우리와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바쁘게 왔다 갔다하며 저녁식사준비를 했다.

"당신은 남편이 개원하고 있는 소아과의 manager로 직원이 10명이나 되어 그 사람들을 관리해야하고 수입, 지출, 회계 등 재무관리하는 일이 너무 많을 것인데 우리를 호스트하느라 이틀이나 내주겠다고 하니 너무 미안하고 부담이 된다."고 우리가 말하자,

"I can manage it. Who am I?

I am a manager."

라고 말하고는 또 '와'하고 크게 웃었다. 영어로 manage는 '일을 처리한다' 라는 뜻과 동시에 '경영한다'는 뜻도 있다. "나는 아무리 바빠도 당신들을 호스트하는 일을 해 낼 수 있다. 내 직업이 바로 manager 즉 경영인이기도 하고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 아닌가 "라는 위트있는 농담이었다. 그녀는 털털한 것 같으면서도 일처리가 빈틈없고 정확했다. 예를 들어 나와 이메일을 주고 받을 때, 내 질문을 자신의 메일에 복사 첨부해서 각각의 질문 밑에 다른 글씨체로 자신의 답을 적어 보내주는 식이었다. 그녀의 이메일 답장을 읽으면, 마치 곁에서 내 편지를 한 구절씩 짚어 가면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명쾌한 답을 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듯 유능하고 똑똑한 여성이면서도 거만하거나 과시하는 면이 전혀 없고 싹싹하고 다정했다. 정말 드믈게 감성과 이성을 균형있게 갖춘 매력적인 여성이다.

오늘 초대 손님인 엄재량고문님과 오이타 서바스회원인 야노 상이 도착했다. 이시와 상은 엄재량고문님이 우리와 같은 시기에 오이타를 방문한 것을 알고 야노 상과 함께 저녁초대를 주선한 것이다.

올해 77세인 야노 상은 오이타 서바스멤버로 한국서바스 사이에 유명한 분이다. 카멜리아 호에 전용 객실을 정해놓고 한국을 많이 다닐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한국 서바스모임에서 잠깐 만났지만, 이렇게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으니 여러 가지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엄고문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야노 상은 오래 전부터 동네 부인들과 함께 외국인 학생들을 일본가정집에 숙박시키면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가르쳐주고 일본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는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학생들을 다수 돌봐주었지만 현재는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 저개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을 돕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이렇게 적응을 도와 준 학생들 중 한 스리랑카학생이 일본 호텔에 취직되자, 그 부모가 감사하다고 스리랑카까지 야노 상을 초대해서 그 부모를 만났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고생을 죽도록 했다지만.

거창한 저녁식사가 나왔다. 식당에서 주문한 스시 도시락에다 돼지갈비구이, 닭고기구이, 오뎅, 야채사라다에다 김치와 명란젓까지 나왔다. 우리 말로 주부가 음식을 많이 장만하면 손이 크다고 표현하는데 정말 이시와 상은 손이 큰 여자다. 그리고 원래 일본식 식사는 '이찌닌 마에'(한 사람 몫)라고 해서 한사람이 먹을 것이 소꿉장난 같은 작은 그릇에 따로따로 담겨져 개인 앞에 나오는데 이 댁은 식탁 테이블가운데 큰 음식접시를 놓고 덜어먹는 서구 식 뷔페스타일이었다. 어쨌든 음식도 푸짐하고 오고가는 이야기도 풍성했다.

전문 여행가이신 엄고문님의 무궁무진한 여행담이 시작되었다. 야노 상 남편과 얽힌 이야기부터 나왔다. 엄고문님의 일본과 인연은 Far East Asia Area Coordinater였던 야노 상의 남편과 서바스회의 차 멜버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면서도 왜 먼 나라인가? 우리 서바스끼리만이라도 가깝게 지내보자 라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먼저 일본 서바스 5인을 한국에 모셔와서 서바스 회의를 했다. 다음 회의는 일본에서 하자라고 약속을 한 후 야노상의 남편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야노상에게 남긴 남편의 유언은 당신이 한국과 일본을 서로 친목하게 하는데 힘써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 한국 서바스 20명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일본인 회원 집에 홈스테이 시켜주며 회의를 갖게 했다. 당시 세계 서바스회장이 일본모임에 참석하기위해 멜버른에서 날아와 이웃나라 끼리 잘 지내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이 아시아모임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 일본모임을 계기로 전세계 서바스는 이웃나라끼리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서 비롯된 것이 현재도 2년마다 개최되고 있는 East Asia Meeting이다. 다음 회의는 2013년 중국광동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엄고문님은 한국서바스 초기에 진정한 서바스 hospitality(환대)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이라고 생각하고, 보고 배우라는 취지로 한국회원들을 한번에 8명씩 데리고 와서 일본가정에 나누어서 홈스테이 시켰다. 일본서바스회원들은 한다면 확실히 하는 사람들이다. 형편이 안되면 안된다고 애초에 거절하지만 일단 손님을 맡으면 최선을 다해서 성의껒 대접한다. 일본인들의 책임감은 정말 감동적이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몫을 완벽히 해내지 못하면 남에게 폐가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일본인들은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일본인들을 칭찬하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사꾸라 또는 친일파 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좋은 점은 인정해야 한다. 고 했다.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8시경 이집 주인 이시와선생님이 귀가했다. 그는 오이타에 개업하고 있는 소아과 전문의로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8-9시에 일이 끝난다고 했다 1주일에 6일간 일하는데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수가 200명 정도이고 어떤 때는 250명일 때도 있다. 오이타에서 환자가 많기로 1.2등을 다툰다고 한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에서 신생아분야를 2년간 수련받았다. 귀국해서 그 분야를 계속 연구하고 싶었으나 여건이 허락치 않아 11년전에 개업을 했다. 개인병원이지만 다른 병원에 있는 젊은 의사 2명이 지금 현재 그의 병원에 파견되어 일을 배우고 있을 정도로 그 의술을 인정받고 있다. 비록 개업을 하고 있지만 학구적이고 유능한 의사인 것 같았다. 이년 전에 암수술을 받고 그때 2주간 쉬고 11년간 계속 일했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진료실에서는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흰색 가운을 입지 않고 넥타이도 만화 캐랙터가 그려진 것을 맨다고 했다.

내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이시와 선생님 왜 혼자서 그렇게 많은 환자를 봅니까? 건강을 생각해서 paid doctor(월급주는 의사)를 한명 고용하시지요. 좀 편하게 일하면 의사 일은 나이가 70-80이 되어도 오래 오래 할 수 있어요 ."라고 충고를 했다. 이시와선생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부인 이시와상은 "내 남편은 Workaholic(일 중독자)이예요" 하고 원망과 걱정어린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