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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

강재일 2007-10-31 (수) 08:54 조회:2170

베트남 여행記
베트남 여행

여행은 설레임으로부터 시작된다든가?
호주 연수를 다녀 온 것이 해외 나들이의 최근이었던 내게 태양의 나라 베트남 여행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마침 직장에선 주춤하던 적조(赤潮)가 다시 극성을 피우는 바람에 전 직원이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아랫사람이 휴가를 해도 말려야 할 입장에 자리까지 비우자니 마음은 천근이다. 하지만 이미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일은 벌어진 뒤다. 입고 갈 모시한복까지 준비해준 제수씨의 고운 마음이 자꾸만 사무치니.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떠나고 볼 일이다.

김해공항 국제터미널.
출국수속을 하고 있는 아우를 보며 문득 내 손에 ‘체 게바라’의 시집이 들려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우연일까?
적들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결국 그 적들의 영혼에는 총을 쏘지 않았다는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 그를 두고 싸르트르는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8월 27일 오후 9시 40분.
베트남 행 비행기의 이륙이 시작되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둠. 고도를 높이는 비행기가 11,852미터 공중에 우리를 매달아 놓았다.
시속 825키로 미터로 날고 있는 비행기의 바깥온도는 영하 51도. 얼음보다 차갑다.
저녁식사는 기내식(機內食)으로, 머리를 식히면서 영화 감상. 얼마를 왔을까. 호치민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아나운서의 코멘트가 들린다.
밤을 잊은 호치민 공항 대합실에는 민중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대신 게슴츠레한 공안원의 비린 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짙은 카키색 군복에 붉은 띠를 두른 모자. 그리고 어깨엔 두개의 별을 견장으로 붙인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군 복장을 한 검열관이 눈의 초점은 다른 곳에 둔 채 부지런히 지껄여 댄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웃 게이트의 젊은 여인이 거들어 준다. 아무 호텔이나 숙소의 주소를 적으라는 주문이란다. 참 내. 별 것도 아닌 것을. 무표정이 표정인 그들로부터 어서 벗어나고픈 심정뿐이다.
짐을 챙겨 자동문을 나서는데 일찌거니 마중 나온 정다운 얼굴이 안겨온다.
반갑다. 이런 이국땅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던 인민군 복장의 검열관도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사람. 화안하게 웃고 있는 ‘마중 객’ 덕분이다.
택시에 짐을 싣고 호텔로 갔다. 반가운 인사도 내일로 미룬 채.

눈을 뜨니 ‘First Hotel’의 열려진 커턴 사이로 한국보다 2시간 늦은 아침이 스며들고 있었다. 문화란 생성시키는 자의 눈높이만큼 성장해 가는 ‘도깨비’같은 것.
느림!
이것이 내가 찾아 낸 베트남 사람들의 공통분모다. 느림은 ‘틈’을 확보해 낸다. ‘틈’은 ‘사이’가 아닌가. 베트남사람들의 완만한 여유가 바로 이 삶의 ‘틈’임이 틀림없다. 잠시 아침의 ‘틈’에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베트남은 지리학적 위치상 주역의 건괘(乾卦)에 속한다. 하늘이란 뜻이다.
“中에 居하여 치우치지 않으나.....,
세속(世俗)에 의해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
1달러 지폐 한 장을 뽑아 들고 “팁!”이라며 뻐기는 인간들을 보며 하늘을 닮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더구나 잊지 못할 원수 미국의 앞잡이로서 무자비한 학살을 서슴지 않았던 이름까지 섬칫한 무시무시한 파월장병을 연상 하지는 않을까. 백호(白虎)라는 말도 모자라 맹호(猛虎)는 무엇이며 청룡(靑龍)은 무엇이었던고. 1975년 30년을 끌던 항미(伉美)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종전(終戰)을 고(告)한지도 어언 33년. 호치민의 외침이 등골을 후빈다.
“We must forgive, but not forget"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간방(艮方)’에서 온 사람. [艮]은 ‘정지’요 ‘머무름’이며 ‘그침’이다. 그래서 고요하게 아침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적대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심사(深思)를 헤아리며.
잠시 거리에 나섰다.
사방이 꽃밭이다. 그런데 꽃나무에만 꽃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얼굴에도 만발이었다. 아니 그들은 그대로가 하나의 꽃이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꽃.

-“네가 점점 높은 담장을 쌓고 있는 사이에 네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게 되는지 생각해보렴. 진정한 성공이란 참된 의미를 베풀고 함께 나누는데 있는 것이 아니냐?”-

위의 글 제목을 [베트남을 위한 시]라고 붙였다.
그들은 유독 미소가 많다. 미륵반가사유상을 닮은 온화한 미소. 일본의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는 이 절묘한 아름다움을 두고 “아리송한 불확실성의 아름다움”이라 했다. 참으로 말 할 줄 모르는 양반이다. 아리송할지는 몰라도 아름다움은 확실하지 않은가. 이 확실한 아름다운 미소가 풍족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만족하게 해주는 본질적 힘이리란 확신이 선다.

10시 55분.
8월 28일의 일정을 위해 Check out.
미니버스 한대를 렌트하여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Cu Chi'로 향했다.
전설이 되어 버렸다는 곳. 하지만 그곳에는 어떠한 전설도 없었다. 처절한 삶의 흔적이 박제되어 그들이 파 놓은 참호속의 철침처럼 녹슬고 있는 현실만이 있을 뿐.
그런 절박한 전쟁터에서도 끝까지 숭앙했던 종교와 조상신(祖上神). 개미굴 같은 미로를 따라 승냥이 같은 침략자들을 피해 몸을 숨기면서 죽창으로 총칼에 맞섰던 그들의 용맹스런 모습들이 찬찬히 오버랩 되어졌다.

늦은 점심을 먹고 호치민 제일의 놀이공원엘 들렀다.
연담유락공원(蓮潭遊樂公園). 이름처럼 연꽃이 만발한 연못에는 살아 있는 화석 ‘시라칸스’가 꾸물거렸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태공들의 모습도 이채로웠다.
캐리어를 타고 한 바퀴를 돈 뒤 얼음으로 지은 궁(宮)을 둘러보고 하루 일과를 마쳤다. 유 사장 댁에서 우리를 위한 저녁준비를 한다는 전갈이 왔기 때문이다. 산뜻한 색상으로 단장된 저택. 그의 부인과 두 명의 도우미 아줌마의 손길이 분주하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한국 요리. 유난스레 삼색이 어우러진 산적이 눈에 띈다. 아껴 뒀다는 위스키까지 곁들인 환대. 말 그대로 성찬이었다.
거나한 밥상을 물리고 2층 거실에서 아우는 차(茶) 자리를 폈다. 신기해하는 그들에게 차(茶)는 물론 다구(茶具)에까지 설명이 진지하다. 제법이다.
차자리가 파했음에도 뭔 아쉬움이 남는지 유 사장은 또 붙든다. 옵딜랑이랑 닭발 맛을 굳이 보고 가란다. ‘옵딜랑’이란 부화 직전의 어린 오리를 껍질째 구운 거라 털과 뼈가 씹히면서 묘한 맛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아우도 나도 결국 그 맛만은 보지 못했다. 유 사장 아내가 직접 호텔을 예약 하고 왔다. 내 방은 Hoang Long Hotel 404호. 에어컨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린다.

8월 29일 수요일.
우리가 3박 4일을 같이 해야 할 메르세데스 벤츠의 운전석에 앉은 카이젤 수염을 기른 중년사내. 결코 사나워 보이진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둑한 인상이다.
메콩강을 건너 연어처럼 거슬러 오르는 자동차들을 교묘하게 피하며 관광지로 소문난 ‘판티에르’에 도착했다. 끝이 없을 것같이 이어진 백사장. 우리 일행은 해안 변에 위치한 조그만 리조트에 여장을 풀었다. 풀장이 딸린 아담한 황조(黃朝). 황조라, 이름이 곱다. 황조의 테라스에서 보는 광경은 정말 가관이었다. 절반의 하늘과 절반의 바다. 그리고 나머지는 고독. 문득 시 한수가 떠오른다.

-무릇
청춘이여 모래 벌을 달려라.
노도의 술렁거림이 기다리지 않는가.
가슴을 뒤집고 드러낸 이빨
그 이빨의 깊이를 재어라.

자(尺)가 없는가?
그렇다면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니다.
태고(太古)적부터 희생된 생명들
그 망령들의 편지를 보라.
지워져 가는 녹도문(鹿圖文)!
그 발자취를 읽어라.-

곡비(哭婢).
남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일종의 호곡(號哭)꾼. 테라스에서 듣는 파도소리가 곡비의 곡성처럼 귀에 거슬린다.
하늘엔 구름, 바다엔 파도. 머얼리서 노을이 깔리는 바다를 굽어보는 뭉게구름이 풍성한 가슴을 열어 제친다. 그 열려진 가슴팍에서 터져 나오는 남국의 정열. 보잘 것 없는 한 남자를 갑자기 쓸쓸하게 만들어 버린다.
밤이 되면서 파도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진다. 갑자기 저녁식사 때 먹은 바다가제, 킹 크랩, 새우튀김, 생선회와 담백했던 생선지리의 맛이 접시를 나르던 소녀의 초롱한 눈빛들과 어울려 파도의 음률로 피어난다. 늘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고 내 아우가 그렇다. 한 무리의 인간들이 지나간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래펄을 하모니카를 불며 홀로 걸었다. 간간이 파도의 간지럼이 발등을 태울 뿐 슬픈 곡조는 끝이 없었다. 수평선에 꼬리를 잡힌 파도는 그렇게 밤새도록 칭얼거렸던 것이다.

내 방의 위치를 알 바 없다. 하지만 분명 해가 기울었던 쪽이 서쪽이렷다.
8월 30일. 눈을 뜨니 어김없는 6시.
하늘은 온통 회 빛인데 어제 보이지 않던 작디작은 토막 배들이 어지러이 떠 있다. 아마도 어로(漁撈)작업을 하고 있으리라. 천천히 풀장으로 나가 몸을 풀었다. 풀장에서 보는 하늘은 또 다른 모습이다. 잘 자란 야자수가 허공을 찌를 듯 구름을 매달고 있었다. 풀장 청소를 하기위한 일꾼들의 모습이 보일 때에야 자리를 떴다.
조용한 테라스. 반쯤 누운 자세로 책을 폈다. 세상이 갑자기 멎어 버린 느낌이다.
오늘은 또 다른 휴양지 야쨩(나트랑)으로 간다든가?

-가자는 거냐.
가자는 거냐.
갈 곳 없이 가자는 거냐.

꽃 필 때 새 울고
새 울어도 꽃 없다.
꽃 보니 새 생각나
새 생각나 꽃 곱다.-

세상은 언제나 ‘좋은 것’과 ‘좋아 하는 것’의 공설 운동장이다.
또 한 수

-생각이 난다
바다를 보면

피
펑 펑

하늘에 매달려 터져버린
이슬 위에서만 아름답던
보기만 하여도 애잔한
네 생각이 난다
바다를 보면-

잠시 책을 덮고 숨을 고른다. 기다림 속엔 움직임이 있다. 설레임.
아침을 먹고 또 한번 테라스에서 허연 거품을 물고 세상을 뒤흔드는 바다를 본다. 그 소란을 뚫고 한 가닥 어중한 일상이 침잠(沈潛)의 오후를 쏟아 내고 있다.
세상은 한 접시의 카오스 모스.
나트랑의 Phu Quy Hotel에 여장을 푼 뒤, 부산에서 온 중년이 5년 전에 개업 했다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는 ‘씨클로’를 타고 밤 풍경을 보러 나섰다. 유모차 같은 씨클로를 타고 둘러 본 야쨩의 밤. 온갖 형상으로 전정된 가로수가 새로 짓는 신축 건물들과 멋들어진 조화를 이루며 야쨩을 수놓고 있다. 즐겁고 행복한 밤이다.

새고 보니 벌써 8월의 끝 날이다.
게으런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을 보고 “부지런을 떤다”고 핀잔해도 괜찮은 세상.
그런 게으런 사람은 화려한 삶을 ‘소비하고’ 있지만 땅콩 한 줌을 손 자전거에 싣고 손님과 눈길 마주치기를 고대하는 부지런한 사람은 삶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문득 초라한 아주머니의 부지런한 눈빛이 게으른 화려함을 뒤흔들고 있다.
그 곳을 떠나면서 두리안(사우링)이라는 과일 맛을 봤다. 아우는 맛있게 먹었지만 난 목구멍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정말 지독한 냄새. 달랏으로 가는 길 내내 그 두리안의 공포는 차안을 배회했다. 자근자근 비 내리는 산길을 달리는 기분도 이국적이었다. 가끔씩 소떼를 몰고 가는 목동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문득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오로지
낚시꾼만이 시간을 안다는 것.
그것을 안 것이다
그리고
낚시는 ‘목적론’이 아니다.
낚시꾼에겐
처음도 끝도 없는 집중이 있다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삶.-
             -이르쿠츠크의 기행 시 ‘낚시’에서-

왜 느닷없이 이 시가 생각났을까?
해발 1,450미터의 달랏.
그 중심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붙박혀 산다나.
9월의 초하루를 여는 아침 햇살이 장난이 아니다. 싱그럽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하다. 갑자기 이 싱그런 햇살이 나를 조사(釣士)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 노래방에서 피운 담배 탓인지 목안이 답답하다.
프랑스령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가 기거했다는 ‘왕궁’으로 갔다. 가는 길섶으로 수국이 흐드러졌다. 수국. 자그마한 꽃송이들이 색색들이 무리를 이뤄 피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들려 준 얘기가 생각나 낙서 한 줄.

-수국.
수국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 수국이 좋아
수국 좋아서 수국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

토양에 따라 변한다고
꽃 색까지 변한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탓을 하지만
내가 변하지 않으면 변하는 건 없는 법
세상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

길 안내를 맡은 지현이도 베트남 역사에 대해 미숙하니 왕궁에 얽힌 설명을 들을 방법이 없다. 입구에선 헝겊으로 만든 덧버선을 신었다. 머뭇거리는 내게 아우가 얼른 버선을 신겨준다. 어디로 가든지 든든한 보디가드다. 구경꾼들의 대열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유럽풍의 화려함과 동남아풍의 담백함이 어우러진 실내가 무척이나 정겹다.
훤칠한 모습의 왕자, 빚은 듯 고운자태 퀸, 잠시 그들의 망령에 묵념을 올렸다.
그들의 휴식공간과 집무실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치다 자칫 놓칠 뻔 했던 밀소(密疏)를 발견했다. 일칭 [Moon Watching Balcony]!
하릴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때론 허심(虛心)의 나를 찾고자 달을 보건대.
-영화
부귀
나눠 쥔 고여(高麗)한 침묵.
그리고
침묵의 그림자.
아!
Moon shadow!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
하얀 그림자를 찾는
또 하나의 그림자.
사방천지가 불길이다.
훨 훠얼 훨~
불놀이야.

낮이 밤
밤이 낮
그래서 낮이면 낮
밤이면 밤

사랑이란?
세월 앞에서
뚜벅뚜벅
자신의 심장을 여는 것.-

왕비와 왕의 달 놀이.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훤한 대낮인데도 달그림자가 눈부시다. 중천으로 솟는 달. 그 달의 볼처럼 밝은 두 연인의 사랑이 밤의 냉기를 덥힌다.
허어~~ 갑자기 달무리가 진다.

야쿠자의 딸로 태어나 온갖 차별과 혼란과 비행(非行)의 기억을 자서전으로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주목 받고 있는 쇼코 텐도. 그녀는 자신을 구출하자는 의지와 힘을 몸의 문신(文身)에서 얻었다고 고백하면서, 새 삶을 결심하던 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고 했다. 갱생의 삶을 살아가게 한 달. 그 달은 쇼코 텐도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였던 것이다. ‘Moon Watching balcony’에서 스러져 가는 베트남왕조의 미래를 걱정하며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겯고 바라보던 그 달의 이미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계획적’이란 말은 매력이 없다. 그런 머슥거림이 싫어 우리 일행은 나름대로의 대안을 강구했다. 마냥 길 따라 가다가 쉴 만한 곳이 있으면 쉬어 가자고. 하지만 운전수는 혼자 서둔다. 가족이 그리운 탓이리라. 구불텅한 산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간간이 보이던 녹차(綠茶) 경작을 위한 밭이랑이 아예 시야를 메워 버린다. 한 시간을 넘겨 달렸는데도 끝이 없다. 세계 2번째의 커피 산국(産國).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녹차는 중국을 넘볼 기세다. 아예 녹차 나라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다.
호치민으로 되 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비까지 거들어 도로의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힘 든다. 빗길을 다퉈 하루 일찍 도착한 곳은 우리가 이틀째 머물렀던 Hoang Long 호텔. 씻는 둥 마는 둥 그냥 잠자리에 퍼져 버렸다.
침잠의 시간을 깨우는 종소리. 분명 밖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서양의 종소리다.
동양의 종(鍾)은 안에서 울리지만 서양의 종은 밖에서 울린다. 밖에서 두드려 안으로 스며들어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 그것이 동양의 소리다. 동서양의 소리는 소리의 방향만 반대가 아니라 울림역시 반대다. 안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 거기에는 분출의 파워가 있다. 그러나 에밀레의 혼이 빠져버린 유럽의 종은 무미한 떨림일 뿐이다. 소리의 껍데기. 며칠 전에 들었던 그 빈껍데기의 소리가 또 새벽을 흔들고 있다.
9월 초 이틀. 난 메모지에 이렇게 적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과정 그 자체에 깊은 의미가 있다네.
목적을 위해 과정을 희생시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게.
9월 2일의 메시지.-

그리고 시 한 가락을 덧붙였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
!
보고 싶다.
잠~.
그리고
또
보고 싶다.-
----------
아직도 성에 차지 않아 또 한 수 끄적인다.

-빈 잔을 들고
칠 부 쯤 우유를 채우고,
다른 접시 하나
카스테라 두 쪽.

포크와 나이프
삶은 계란 한 개와
내 몸 하나.

10분의 동작
5분의 휴식
-----
휴식 끝!

세상은 똥 천지
식탁에 덩그런 똥 무더기
먼저 온 손님이 남긴 똥
게걸스럽다.
똑똑!
똥 싼다.
자유의 배설
아! 광복이다.-

오늘이 사이공 광복 62주년이란다.
그래서 호치민 밤하늘의 별들이 전부 길거리로 내렸던 것이었구나.
베트남의 영웅 호지명. 난 호지명을 존경한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하듯 영웅은 영웅다우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제!
영웅 만세!
영웅 만만세!!

대통령궁 앞의 동물원을 둘러서 기념품 매장(賣場)엘 들렀다.
온 길거리엔 세상 인종들이 들끓고 있다.
잡탕! 난 속절없이 그 잡탕 속의 한 낱 건더기가 되고 만다. 고급문화와 저급 문화가 공존하는 마당. 그런 어울림이 자유로울 때 그 모습은 아름답다. 혼돈이 아니라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치민시’는 세계민중의 ‘어울터’다. 조율과 조화의 음조가 화합되어 흐르는 어울림의 터. 그 어울림 속에 섬 같은 나는 누구?
윌든 호숫가에 기거하면서 인두세(人頭稅)를 내지 못해 유치장에 갇혀 있는 ‘소로우’에게 그의 절친한 친구 ‘에머슨’이 물었다.
“자네, 왜 거기에 있지?”
그러자 소로우의 답. “너는 왜 거기에 있니?”
인생의 길에서 가치관의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만나다는 건 확실한 축복이다. 푸른 기와집의 노망든 어른의 ‘코드론’과는 그 의미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점심을 먹은 다음 또 쇼핑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볼링 게임.
스코어가 아우랑 동점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우의 화려한 솜씨가 아마도 모자라는 형의 점수에 맞춰 준 것이 분명하다. 행복하다. 자잘한 것에 까지 세심한 아우가 있다는 것이.
마무리를 하려는 차에 업무에 바쁘다던 유 사장이 찾아왔다. 업무를 핑계로 모시지 못해 편찮단다. 결국 가라오케에 가기로 합의를 보곤 곤드레만드레.
새벽 1시. 종업원들의 성화가 불같다. 기분에 도취되어 너무 지체가 되었었나 보다.

9월 3일.
일찌거니 짐을 챙겨 유 사장 네에 짐을 내리고 쇼핑을 나섰다.
별스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예쁘장한 점원 아가씨가 어제의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신체 기관이 자유롭다는 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 손짓 발짓 연필 짓 등으로 겨우 말머리를 틀어가며 우린 제법 친숙한 사이가 되어갔다. 서로가 연출해낸 묘한 언어로 허물어트린 국가간의 간격. 그녀가 알고자 하는 간단한 한국어 몇 마디를 가르쳐 주고 나니 왠지 모르게 뿌듯해진다.
이렇게 베트남의 일정이 마무리되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 헤어진다는 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법. 장거리 비행을 염려하여 사우나탕에서 마사지를 받다가 시간이 임박한 일행들의 안달에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공항은 이별의 종착점이다.

경상도의 작은 섬 우도(牛島). 그 초라한 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소년기를 자란 언론인 ‘김성우’씨는 그의 자서전에다 ‘섬’이란 결코 바다에 둘러 싸여 갇힌 그 무엇이 아니라 어린 몸뚱이를 키워낸 마당이고 울타리라 적었었다.
그랬다. 베트남은 평야에 떠 있는 하나의 섬 같았다. 평야에 떠 있는 섬. 고층 빌딩도 시야를 가리는 높은 산도 보이지 않는, 다만 어지러이 섞여 달리는 오토바이의 행렬만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섬. 그 ‘사이공’에는 그 곳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배운 [호치민]이란 영웅이 살고 있었다. 프랑스에 시달리고 영국에 시달리고, 그리고 미국에 시달리고 미국을 지지하는 연합군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베트남의 자존심을 유지하게 했던 영웅이.
징기스칸이 바깥세상을 향해 무한 한 꿈을 키우던 당시 그의 유일한 친구는 북극성이었다고 한다. 북극성은 남녁 육두성과 북녘 북두칠성을 거느리고 다닌다. 하지만 호치민의 하늘에는 북극성은 물론 육두성과 북두칠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사이공 시민들의 가슴 가슴에는 ‘호치민’이라는 커다란 별 하나가 북두칠성으로, 남두육성으로, 북극성으로 찬란히 찬란히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을 일러 천 번의 외침을 당한 ‘한의 민족’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베트남은 한번의 침략으로 민족을 잃었고, 또 한번의 침략으로 민족성을 잃을 뻔 했다. 그러나 잃을 뻔만 했을 뿐 결코 그들은 그들의 민족혼을 잃지는 않았다.
적에게 능욕 당한 아내가 낯 선 아이를 출산하고, 아비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어버이의 사랑을 찾아 절규할 때 그 아이에게까지 총알을 난사 했다는 비극의 땅.
그런 그들에게 한(恨)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곳곳에 찬란한 꽃으로 피는 붉은 바탕의 노란별이 그들의 민족혼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복자였다는 ‘징기스칸’.
그가 그토록 위대 하게 된 것은 훌륭한 가문이나 많은 재력이 아니라 오르지 인간을 사랑하며 존중할 줄 아는 '큰 마음' 하나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이해할 줄 아는 능력. 그것이 그가 지닌 전부였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뜨거운 가슴에서 분출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열정이 있다. 일본인이 제일 존경한다는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가 말하는 그 열정(熱情). 아무리 지능지수(IQ)나 감성지수(EQ)가 높다 하더라도 제3의 능력'유추지수(AQ)'가 낮다면 껍데기다. 그래서 영웅은 뜨거운 열정(PASSION)으로 이익(P), 야망(A), 진실(S), 용기(S), 혁신(I), 낙관(O), 인내(N)를 유추해 내어 '어울림'으로 환원 해 내곤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난 영웅이 좋다.

한국으로 오는 날, 난 베트남의 밤하늘에서 보지 못한 별을 비행기에서 보았다. .
저물녘 홀로 떠 외롭던 개밥바라기가 찬란하게 샛별 되어 반짝이는 것을.

Heung-sook,Lee 2007-10-31 13:14	많이 느끼시고 많이 생각하는 여행이었네요. 인상깊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HoangInBok 2007-10-31 14:32	상세한 설몀에 저도 여행을 다녀온듯 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대구 모임에 참석하시나요?

손화자 2007-10-31 18:42	밑줄치기 하면서 읽었습니다. 베트남 꼭 ~가봐야지 다짐도 하구요.

JongSooKIM 2007-11-02 06:05	좋은 여행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직접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대구 오시지요?

강재일 2007-11-02 09:38	이흥숙지부장님, 황인복 선생님, 손화자 선생님, 김종수 회장님(?) 변변찮은 글 재밌게 읽으셨다니 영광입니다. 대구 모임엔 꼭 참석키로 하겠습니다. 꾸벅~

SungreiKim 2007-11-04 23:34	시가 있는 기행문이 더욱 더 깊이를 더 해 줍니다 인생은 여행길인데...우리 이 소풍을 즐겁고 의미깊게 후회없이 아낌없이 살며 사랑하다 가야할 텐데요.....

hankounLIM 2007-11-22 17:31	윌든 호숫가의 소로우를 좋아합니다. 확실히 가치관의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축복인 것 같습니다. 호치민! 꼭 한번 가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