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서바스 4일째

눈을 떠보니 엷은 겨울 햇살이 하얀 장지문으로 들어와 방안의 풍경을 비쳤다.

정면 벽 왼쪽에 할아버지 사진을 붙여놓고 위패가 모셔진 불단이 있었다. 제단 앞에는 과자, 사탕 등 공물이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천황으로부터 받은 공로상이 걸려 있는데 우수교사로 포상한다고 써 있었다. 그리고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동네 소방대원으로 자원봉사하신 듯, 자원봉사 소방대원이라는 패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내 시선을 끈 흥미로운 물건들은 할아버지 사진 주변에 놓여 있는 류헤이군의 소풍사진이랑 색종이접기들, 그림 그리고 각가지 공작품들이었다. 아마 류헤이군은 유치원에서 뭔가 자랑스러운 것을 만들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할아버지와 대화하며, 보여드리려고 여기다 갖다 놓은 것 같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이처럼 어릴 적부터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조상숭배 이전에 상당한 교육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류헤이군은 성장해 나가면서, 평생을 바른 교육자로서 사셨던 할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할 때마다 할아버지의 든든한 보호와 지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식사하러 오라고 류헤이군이 와서 '고황 데끼다요!( 밥 다 되었어요)'라고 장지문 앞에서 큰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류헤이군은 내 남편이 일본어를 알아 듣는 줄 알고 아침에 샤워하는데 욕실 문을 삐꿈이 열고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어제 저녁 선물을 고맙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예쁜지! 정성껒 차린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전통 일본식으로 모든 음식이 조그만 접시에 일인분씩 놓여 있었다. 쌀밥, 미소시루, 야채사라다, 할머니가 만들었다는 치즈같이 발효시킨 두부 모로미즈게, 갈색나는 콩자반 등 전통 일본 식사였다. 어제 저녁 늦게 귀가한 이 집 가장 노나카씨와 첫 대면했다. 자그마한 키에 전형적인 일본남성의 모습이었다. 그의 영어 실력은 부인과 비슷한 초보수준이었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사실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은 언어실력과는 무관한 모양이다. 대충 영어와 일어를 적당히 섞어가며 화기애애하게 아침식사를 하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이 사람과 사람을 얼마나 쉽게 가깝게 만드는지! 우리는 마치 며칠 다니러 온 이 가족의 일가친척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착각마저 들었다.

어디가나 어린이가 관심의 촛점인데 당연히 류헤이가 식탁의 관심을 다 모았다. 이즈미 상은 아들이 밥을 많이 안 먹어서 키가 안 큰다고 걱정이라면서 어떻게든 먹여보려고 안타깝게 이것 저것을 자꾸 권했다. 내 남편이, "류헤이군은 너무 예의 바르고 명랑하고 밝은 성격입니다. 할머니께서 손자를 잘 키우셨어요." 라고 할머니를 치켜세웠다. "저의 남편의 평가를 믿으세요. 몇십년 동안 정신과 의사를 했기 때문에 사람보는 데는 도사예요."라고 내가 거들자, 할머니는 자랑스러운 듯 손자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교사인 남편을 곁에 모신 사모님으로서 교육에는 자신이 있다는 듯한 당당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식사 후 노나카씨와 류헤이군과 함께 동네 산보 길에 나섰다. 노나카씨의 집은 어제 밤에 보던 것보다 규모가 상당히 컸다. 대지 200평에 건평이 60평이라고 했다. 전체가 목재로 지어진 이 일본 전통가옥은 2층으로, 아래층에는 식당, 욕실, 화장실, 방 2개가 있고 이층에 는 큰 서재와 방이 2개가 있다고 했다. 노나카씨가 태어나서 자랐고, 부모님에게 물러 받아 여태껒 살고 있다. 작년에 화장실과 부엌은 최신식으로 리모델링 했다고 한다. 마당에 꽃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고, 길 하나 건너 할머니가 가꾸는 텃밭이 있어 집에서 먹는 야채는 할머니가 손수 재배한다고 했다.

류헤이군의 손을 잡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들판 위에 여유롭게 펼쳐진 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논밭가운데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우리나라 농촌의 몰골과는 완전히 달랐다. 온 마을이 고색창연한 옛날 목조 가옥뿐이었다. 집과 자연이 어울려서 아늑하고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저 큰 2층 집에는 95세 된 친척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고, 저기는 삼촌집이고 저기는 숙모집입니다. 라고 노나카씨는 손으로 가르키며, 동네를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마을 안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노나카씨네 가족묘지는 집에서 몇 분도 안되는 지척에 있었다. 우리가 잔 방안에 모셔둔 사진 속의 인자한 할아버지는 사랑스런 손자가 자기 아들의 손을 잡고 매일 자신이 묻힌 곁을 지나다니는 것에 얼마나 흐믓해하고 안심이 될까. 죽음이 임박해서도 죽어서도 자손들과 가까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면 삶의 허무감이나 죽음의 두려움이 덜할 것 같다. 조상의 묘를 곁에 두고 살아있는 후손들이 죽은 조상과의 관계를 현세의 삶 속에 지속시켜 나가는 이런 아름다운 전통도 농촌에만 남아있는 유물처럼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것마저 조만간에 사라질 운명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류헤이군이 양지 쪽에 갓 터진 꽃망울 하나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야! 예쁘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어린 것이 벌써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다니 신기했다. 자연 속에서 살다보면 누구의 가르침이 없어도 자연의 아름다뭄에 저절로 눈이 뜨나 보다. "따뜻한 감성교육에는 자연만한 것이 없어요. 류헤이를 위해서 당신은 참 좋은 곳에 살고 있군요" 라고 우리가 또 칭찬을 했다. 그러자 류헤이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른 걱정거리를 털어 놓았다. 이 동네는 주위에 젊은 부부들이 직장이다 교육이다 해서 자꾸 도회지로 이주하다보니 노년층만 남게 되었다. 이웃에서 류헤이 또래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현재 다니는 유치원의 원생도 나날이 줄고 있다. 지금 당장은 맑은 공기와 청정한 자연이라는 그 장점 때문에 여기 살고 있지만 앞으로는 류헤이가 나이들어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니게 되면 부모가 도시로 이사를 가야할지 아니면 류헤이를 객지로 혼자 내보내야 할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오늘의 일정은 구마모토성을 구경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오늘 굽은 등 때문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와 동행하지 못하고 류헤이군을 비롯한 5사람이 노나카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구마모토성으로 갔다. 우리끼리 관광해도 된다고 하니, 노나카 부부는 자기들도 천수각을 복원한 뒤에 구경을 안 갔기 때문에 이참에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구마모토성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돌담을 쌓은 것이 아주 견고하고 그 곡선이 아름다웠다. 세이난 전쟁 때문에 불이난 뒤 1960년에 다시 옛 모양으로 복원되었다는 천수각은 상류무사들의 일상 생활도구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특히 세련된 색채와 감각으로 꾸며진 방들은 옛것이라고는 믿어지지않을 정도로 멋이 있었다. 성 뜰안 여기저기에는 여러 가지 고대 무사의 복장을 하고 긴 칼을 찬 사람들이 관광객들과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해주고 있었다. 류헤이군은 단연 무사들에게 인기최고였다. 당당한 무사들의 곁에서 너무나도 작은 꼬맹이가 위엄을 부리며 무사흉내를 내는 모습에 지나가는 관광객들도 미소를 지었다.

구마모토의 라면이 유명하다고해서 점심으로 라면을 먹자고 제의했다. 역에서 5분거리에 있는 '아지센 라멘'집으로 갔다. 돼지뼈로 우려낸 국물이 일품이었다. 다음에 기회있으면 이집의 라멘을 먹으러 일부러 구마모토에 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있었다.

오후에는 온천으로 가기로 했다. 점심식사 후 돌아가 우리는 잠시 낮잠을 자고 오후 3시경에 일어났다. 이즈미상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수건등 목욕준비물을 넣었다면서 주머니를 하나씩 건네 주었다. 손님을 위해 이렇게 세심한 것까지 신경을 써주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 물리치료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노나카부부, 류헤이군과 함께 온천으로 향했다. 한 20-30분을 차로 달려 '사마타 노 유' 라는 온천으로 갔다. 내가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목욕비를 내라고 했다. 남편이 카운터로 가서 5인의 입욕비를 지불하려고 하자, 노나카씨가 이미 티켓을 다 끊어 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서는 순간 노나카씨가 잽싸게 카운터에 입욕료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본사람들은 무슨 장기 입욕권같은 것을 구입하고 온천을 다니는구나 했는데 깜박 속고 말았다. 정직하기로 유명한 일본 사람들도 선의의 거짓말은 가끔씩 하는 모양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노천에서 감히 옷을 벗기가 두려웠는데 일단 온천물에 들어가니 몸은 후끈하고 얼굴에 스치는 맑고 싸늘한 공기는 너무 상쾌했다. 삼나무가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한 30여분간 입욕을 하니 그 동안의 여독이 말끔히 씻겨 나간 느낌이었다.

온천에서 돌아오자 금방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류헤이군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고황데기다요"라고 우리 방 앞에서 외쳤다. 아마 이즈미상은 우리가 낮잠을 자는 동안을 이용해서 미리 저녁 준비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얌전한 여성으로만 알았지만,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직장과 가정을 요령껒 잘 꾸려 나가는 당차고 야무진 주부인 것 같았다.

맛있는 일본전통 가정식을 먹은 후, 후식으로 우리가 낮에 선물로 사온 딸기를 먹었는데, 류헤이군은 밥은 먹지 않고 딸기만 계속 먹어댔다. 이즈미 상이 밥 좀 먹으라고 애원해도 양볼이 미어지도록 딸기를 입에 밀어넣고 오물오물 잘도 먹었다. 우리는 류헤이의 딸기 먹는 속도에 놀라서 저러다 체하는게 아닌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3접시나 게눈 감추듯이 다 먹고는 푸우하고 한숨을 쉬면서 배를 문질러대었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모두가 웃었다. 온천으로 상기된 류헤이군의 양볼이 딸기보다 더 붉었다. 나는 류헤이군이 너무 예뻐서, "류헤이군을 우리의 일본손자로 삼아도 될까요?"하고 할머니께 여쭈었다. 모두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류헤이군에게 우리를 가리키며, "한국의 오지상과 오바상이 생겼네." 라고 말해주니 류헤이군도 부끄러운 듯 빙긋이 웃었다. 한국의 우리 손자보다 류헤이의 생일이 1달쯤 이르지만 나이는 동갑이다. 류헤이군의 생일이 8월12일이라고 하니 한국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일본손자의 생일을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앞으로 류헤이가 커서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면 혼자서라도 한국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놀러왔으면 좋겠다.

노나카부부와 우리의 내일 일정에 대해 의논했다. 하카다부두에서 부산행 카멜리아 승선시간에 맞추려면 구마모토역에서 적어도 8시30분 기차를 타야한다. 기차시간 이전에 역에 닿으려면 적어도 집에서 7시30분전에 출발해야 한다. 나는 이즈미 상에게 너무 이른 시간에 우리를 위해 아침식사를 차리는 것이 미안하니, 아침식사대신 기차 칸에서 먹을 오니기리 2-3덩어리만 싸 달라고 부탁했다.

규슈서바스 5일째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부엌 쪽에서 이즈미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침식사는 준비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일찍 일어나 일을 하는가 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온 식구가 먹을 오니기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속에 우메보시, 우엉조림, 그리고 명란 젓을 가운데 넣어 손으로 능숙하게 삼각으로 만들어 김으로 쌌다. 도시락을 5개나 만드느라고 그처럼 바빴던 것이다. 하카다로 가는 열차 속에서 먹어보니, 그녀에게 오니기리를 싸달라고 말한 것이 실례가 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뭉쳐서 주먹밥을 싸 줄 것으로 생각하고 부탁했는데 이렇게 맛있는 속까지 넣어서 얌전하게 뭉친 주먹밥을 보니, 언젠가 오니기리는 일본인의 소울푸드(soul food)라고 읽은 것이 생각났다. 그녀의 정성이 담긴 소박한 주먹밥 3덩어리는 최고의 만찬보다 더 맛이 있었다. 이때까지 먹어 본 오니기리 중 최고로 맛있는 오니기리였다.

할머니에게 너무 신세가 많았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꼭 식구들과 함께 부산에 놀러 오시라고 당부드렸다. 이른 아침이지만 류헤이군도 우리를 배웅하러 오리털 잠바를 입고 부모를 따라 나섰다. 구마모토역까지 50분간 차를 타고 가면서 도시락 다섯 개 중 우리에게 2개를 주고 3개는 이 식구들이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침식사로 먹을 거라고 했다. 류헤이가 차창밖을 내다보며, '어디, 류헤이군이 좋아하는 것이 있을까' 하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콘테이너나 버스같은 큰 차가 지나가면, 봤다! 봤다! 하고 소리 지르며 좋아했다. 구마모토 역에 도착하니 8시가 되었다. 8시 9분기차를 타도 충분할 것 같았다. 우리가 이즈미상과 류헤이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는데, 노나카씨가 입장권을 사서 헐레벌떡 뛰어 왔다. 그리고는 온 가족을 데리고 개찰구 안으로 들어왔다. 홈안으로 들어와 또 다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에는 부산 우리 집에 놀러와서 그 동안 우리가 일본에서 진 신세를 갚을 기회를 달라고 했다. 출발시간이 되어 기차에 올라타고 차창 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바람이 찬 열차 홈에서 노나카부부와 류헤이군은 우리가 탄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가 일본 서바스에게서 배운 봉사정신은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일본인들을 '혼네(속 마음')와 '다테마에(실제 발언)'가 다르다고 이중적인 국민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대의 기분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내 속에 있는 생각과 말하는 것이 정반대인 경우도 많다. 이런 이중성이 상대방을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님이 왔는데 내가 피곤하고 속이 상한 일도 있다고 그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손님이 어떤 기분일까. 일본인들의 손님에 대한 지극한 친절을 '다테마에'라고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쁜 병원 일을 마다하고 이틀이나 우리를 접대해준 이시와 상, 그리고 맞벌이 부부로서 주말의 휴식도 포기하고 끝까지 웃는 얼굴로 환대해준 노나카부부의 친절을 어찌 한마디로 '다테마에'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우리에 대한 진심이 없으면서 그들에게서 어떻게 그런 태도와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이번 일본 서바스를 경험하고 나서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때까지 서바스호스트를 잘 한다고 자부해 왔지만 일본서바스들처럼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이들처럼 정성을 다해 서바스 손님을 맞이해 보고 싶다. 그래서 우리 집에 묵었던 외국손님들이 고국에 돌아가서도 두고 두고 잊혀지지않는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도록 해주고 싶다.